1672년 10월 17일 알렉세이 황실 내의 영지 쁘레오브라젠스꼬예에 세워진 극장에서 독일인 목사 그레고리에 의해 희곡 [아하수에로]가 공연되었다. 열 시간에 걸쳐 진행된 이 연극에 황제 알렉세이는 몹시 만족했고, 그레고리가 이끄는 독일인 극단은 알렉세이 황제 제위 기간 내내 쁘레오브라젠스꼬예 황실 극장에서 공연하게 되었다. 러시아 무대극의 공식적인 출발점으로 기록되는 이 시기, 서구에서는 이미 셰익스피어, 코르네이유, 라신느, 몰리에르와 같은 극작가가 활동하던 연극의 황금 시기가 일단락 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 연극의 성립 과정을 해석할 때, 각종 연중 행사시의 제례나 스꼬모르흐의 연행과 관련된 전통극을 무시하고, 단순히 서구극을 수용한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비록 17세기 이후 서구에서 유입된 무대극에 극예술의 주도적인 자리를 내주긴 했으나 고대 러시아의 전통극은 20세기 초 상징주의자들의 극작품에서 드러나는 발라간이나 베르쩨쁘 등의 전통극 형식은 그 좋은 예이다.
무리를 지어 마을을 옮겨 다니며 결혼이나 장례, 그 밖의 이교(異敎) 신앙과 연결된 민간 축제 등의 놀이판을 주도하던 스꼬모로흐는 러시아 중세 문화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했다. 스꼬모로흐는 [곰의 놀이], [베뜨르쉬까]등과 같은 고유의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일반 대중들뿐 아니라 공후와 황실 귀족들에게도 인기가 있어 때로는 그들의 영지나 저택에 정착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스꼬모로흐의 연행은 대부분 거칠고 외설적인 표현을 내포하고 있었다. 또한 성직자나 귀족 등 지배 계급에 정착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스꼬모로흐의 연행은 대부분 거칠고 외설적인 표현을 내포하고 있었다. 또한 성직자나 귀족 등 지배 계급에 대한 조롱과 풍자도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 정교와 황실은 16세기에 이르러 스꼬모로흐의 활동을 반종교적이고 반국가적인 것이라 하여 탄압하였다. 그리고 결국 1648년과 1657년, 두 차례에 걸쳐 스꼬모로흐의 공연을 금지하는 황제의 칙령이 내려졌다. 게다가 서구에서 유입된 무대극에 황실과 귀족들의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하면서 스꼬모로흐의 활동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수꼬모로흐에 대한 정교와 황실의 탄압과 때를 같이하여, 끼예프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는 종교극 중 하나인 이른바 학교극(學校劇)이 도입되었다.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와 접경하고 있어서 다른 지역보다 먼저 서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끼예프에서는 당시 폴란드 예수회의 학교극을 모방한 끼예프 신학 아카데미의 학교극이 성행하였다. 그러나 끼예프의 학교극은 폴란드의 학교극과는 달리 막간극(幕間劇)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성서에 따른 진지한 장면들에 희극적인 장면들이 섞여 있다는 점에서 러시아 고유의 특징을 보여 준다. 주로 세묜 뽈로쯔끼 등에 의해 씌어진 학교극의 대본을 학생들로 이루어진 극단이 공연하였는데, 종교적, 도덕적 이념의 대중화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들 학교극은 주로 민간 축일이나 학교 축제 때 볼 수 있었으며 점차 인기가 높아지면서 거리나 지주의 저택에서 상연되기도 하였다.
알렉세이 황제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출발한 17세기 말의 러시아 극문학은 대부분 성서의 모티브를 토대로 한 일종의 종교극이었다. 당시 상연된 독일인 목사 그레고리의 작품들은 복음서의 이야기를 기본 내용으로 삼고 있었으며, 끼예프에서 초빙된 세묜 뽈로찌끼의 극작품들과 황실 극장에서 활동하던 드미따리 로스또뽀비치, 페오판 쁘로꼬뽀비치의 [예수의 탄생], [불가마에서도 타지 않는 세 젊은이], [방탕한 아들의 우화]등도 그 제목이 시사하듯 신비극, 기적극과 유사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러시아 연극 무대에 세속극이 오르게 된 것은 뾰뜨르대제 시기에 이르러서였다. 뾰뜨르 대제는 알렉세이만큼 열렬한 연극의 후견인이 아이었다. 그의 연극에 대한 관심은 서구화와 절대권력의 강화를 위한 선전 도구로서의 기능에 국한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종교극은 교회로 돌아가고 초빙된 외국 극단에 의한 세속극들이 장려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로는 쁘로꼬뽀비치의 [성블라지미르의 희비극]이 유명하다.
뾰뜨르 대제 사후, 안나와 엘리자베따 두 여제가 통치하게 되면서 화실 극장에서는 이제 독일 극단이 아니라 이탈리아, 프랑스 극단들이 두드러지게 활도하게 되었다. 이탈리아로부터 들어온 코메디아 델 아르테, 오페라, 발레가 러시아 무대에 선보였다. 특히 베르사이유를 모방하고자 했던 엘리자베따 여제 시기에는 라신느, 몰리에르, 콜네이유의 작품들을 상연하는 프랑스 극단들이 초빙되어 황실의 화려함과 사치를 더해 주었다. 비록 자국의 극문학에 대한 장려보다 외국 극단의 공연에 치우친 것이긴 했지만, 이 시기 연극에 대한 황실과 귀족들의 열광은 18세기 중반 러시아 고전주의 극문학의 번영에 토대가 되기에 충분했다.
광범위한 영토 확장과 함께 절대 왕권의 절정에 이른 예까쩨리나 2세의 치세는 러시아를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시켰다. 그리고 이 같은 사회, 정치적 변화는 문화, 예술의 영역에도 영향을 주었다. 스스로 10여 편에 이르는 극작품을 쓸 만큼 열렬한 연극 후견인이었던 예까쩨리나 여제는 프랑스 고전주의를 모델로 극문학을 장려하였다. 이후 모스크바와 뻬쩨르브르그에는 상설 극장이 설립되었고, 부유한 귀족들의 저택에는 개인 극장과 극단이 만들어 졌다. 그러나 이 시기의 러시아 극문학은, 비록[호례프], [참칭자 드미뜨리]를 비롯한 아홉 현의 비극을 남긴 수마로꼬프 등의 활동이 있기는 했지만, 독창적이라기보다는 프랑스 고전주의의 충실한 모방일 뿐이었다. 특히 희극은 빈번히 외국 작품의 조야한 러시아 식 번안에 머물렀다. 하지만 러시아의 위대한 풍자 작가로 불리는 폰비진의 출현으로 러시아 극문학은 전환기를 맞이한다.
당대 러시아인들의 프랑스 심취를 풍자한 세태 희극 [여단장]의 성공에 이러 러시아 귀족들의 무지와 횡포를 꼬집는 [미성년]으로 폰비진은 진정한 러시아 최초의 희극 작가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동시대의 다른 희극 작가들은 주인공의 이름이나 장소 설정만 러시아식으로 바꾸는 데 그쳤지만, 폰비진은 당대 러시아의 구체적인 삶과 상황 자체를 묘사하고 있다.
착하고 신의 있는 신붓감과 그녀의 상속 재산을 노리는 무지하고 탐욕스런 주인, 그리고 그들의 혼내 주는 현명한 선의의 주인공의 등장과 행복한 결합이라는 [미성년]의 전개는 프랑스 고전주의 희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전적 도식으로 노골적인 계몽주의적 의도를 담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이야기 구성의 이와 같은 고전 도식에도 불구하고, [미성년]은 러시아 삶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와 러시아적 형상, 생생한 구어적 표현들로 인해 이전의 어떤 극작품에서도 발견되지 않던 새로움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브로스타코바 여사와 스코찌닌, 미트로판의 형상은 이 희극이 오늘날까지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 주된 요인- 폰비진이 당시 [미성년]의 성공의 원인을 스타로둠에서 찾았던 것과 달리-이다.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행위와 욕설, 비어로 가득한 생생한 표현들은 타당하지만 때로 지루하게까지 느껴지는 스타로둠과 쁘라브진의 설교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풍자 희극의 정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1812년 조국 전쟁을 전후로 하여 고양된 사회적 분위기는 시인들의 극작에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눈에 띄는 위대한 극작가를 배출하진 못했지만 이 시기 활동하던 극작가들 중에서 오제로프, 까쩨닌, 끄릴로프으 희곡 작품들은 질적인 측면에서 18세기의 작품들을 뛰어넘기도 한다. 비극은 지나치게 이성을 강조한 고전주의로 인해 단순화된 인간의 복잡한 심리에 접근하기 시작하였고, 희극 역시 교훈성의 강조와 오락성의 폄하를 극복하고 관객에게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18세기와 마찬가지로 극장의 레퍼토리로는 희극, 코믹 오페라, 보드빌이 우세했다. 이러한 경향으로 당대의 귀족 인텔리겐찌야 문학 그룹의 회의상이었던 문학 잡지[초촉등]의 지면에는, 희극의 대상과 희극성의 본질에 관련된 의고전주의자와 혁신주의자간의 논쟁이 실리기도 하였다. 의고전주의자와 혁신주의자 간의 논쟁이 실리기도 하였다. 의고전주의자들은 러시아 현실을 잔지 영원한 희극적 현실의 구현 자체를 목적으로 하며 이를 통해 새로운 연극 체계, 새로운 형식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러시아 연극사에 새로운 전기를 이룬 희곡으로 평가받는 그리보예도프의 희극[지혜의 슬픔]은 이 같은 혁신주의적 입장에서 씌어진 것이다.
[지혜의 슬픔]은 일견 고전주의의 삼일치 법칙을 따르고 잇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파무소프의 저택에서 하룻동안 일어나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런 경향이 보인다. 그러나 <나는 내가 사는 것처럼 자유롭게, 자유롭게 쓴다.>는 그리보예도프의 말이 시사하듯 [지혜의 슬픔]에서 전통적인 희극의 규범들은 형식적인 틀로 최소화되거나 의미를 상실한다. 3막의 무도회 장면이나 차쯔끼와 파무소프의 긴 독백에서 묘사되는 현실은 파무소프 저택에서의 하루라는 시간과 공간을 훨씬 벗어나 예까쩨리나 시대에서부터 니꼴라이 시대까지 이르는 러시아 전체의 시간대로 확장된다. 남녀 주인공 사이의 사라으이 결말도 전통적인 희극과 다른 점을 보인다. 소피야는 긍정적인 주인공 차쯔끼와 희극과 다른 점을 보인다. 소피야는 긍정적인 주인공 차쯔끼와 맺어지지 않고, 부정적인 주인공 몰찰린을 선택한다. [지혜의 슬픔]의 예술적 가치는 당대의 일반적인 플롯이나 극작규범의 준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뿌쉬낀의 정확한 지적대로 작품 속에 묘사된 당대 풍속의 화폭과 인물 성격 그리고 진정한 재능의 표출인 언어에 있다. 상류 사회의 관습과 세태에 대한 날카롭고 정확한 묘사는 드라마 고유의 직접성과 객관성을 통해 최고의 표현력을 획득하며, 일반적인 세태 희극의 캐리커처에서 벗어나 심리주의적 초상으로 변모된 주인공들은 단순하고 일면적인 해석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 고양되어 있다. 또한 작품의 반은 속담이 되어야 한다는 러시아의 속담과 경구적인 표현이 되어 이후의 많은 문학 작품들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며 사용되었다.
뿌쉬킨이 그리보예도프의 [지혜의 슬픔]을 읽은 것은 유형지인 미하일로프스코예에서였다. 1825년을 전후로 한 이 시기에 뿌쉬킨은 당대의 극작술과 연극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드라마에 대한 진지한 사고를 통해 [보리스 고두노프]를 집필하게 된다. 뿌쉬낀 스스로가 낭만주의적 비극이라 불렀던 [보리스 고두노프]는 [지혜의 슬픔]보다 급진적으로 고전주의적 극작 규범들이 파기하며 쓰어진 희곡이다. 우선 전통적인 장이나 막의 구분 없이 23개의 에피소드로 나뉘는 작품의 구성이 그렇다. 또한 1582년부터 1605년에 걸쳐 고두노프의 황실에서 귀족들의 저택으로, 붉은 광장에서 폴란드의국경치를 옮겨 가며 진행되는 사건의 전개는 푸쉬킨이 시간과 장소의 일치를 고려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푸쉬킨이 극작의 주요 원리로 삼고 있는 행동의 일치 역시 전통적인 플롯이나 갈등 구조로 설명되지 않는다. [보리스 고두노프]에서 행동의 일치는 파노라마 식을 전개되는 외적 사건의 내부에서 작용하는 서정적 논리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보리스 고두노프]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푸쉬킨은 이 희곡이 프랑스 드라마에 대한 서투른 모방으로 가득 찬 당대 레퍼토리에 혁신을 가져다 줄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푸쉬킨은 라신느, 코르네이유 등 당대 극작의 모범이 되고 있는 프랑스 고전주의 극작가들의 희곡을 귀족적이라 평가하면서 러시아 극장에는 셰익스피어의 극작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셰익스키어의 극작에서 모든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이른바 민중성을 발견했으며 [보리스 고두노프]도 [지혜의 슬픔]과 마찬가지로 검열에 의해 상연 금지되었다.
1830년 볼지노에서 푸쉬킨은 다시 극작을 시도하여 작은 비극들이라 불리는[인색한 기사], [모짜르트와 살리에르], [석상 방문객], [역병 기간중의 향연]등을 완성한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욕망과 열정을 추구하는 개인과 그 앞에 놓인 한계에 대항하는, 무력하지만 집요한 반란이 이 작품들을 역작으로 결합시키는 열쇠다. 이 작은 비극들은 [보리스고두노프]와 마찬가지로 발표 당시 무대 위에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극당적인 상황에 처한 인간 내면에 대한 통찰과 이의 극적 묘사에 의해 이후 심리주의 드라마의 전범으로 평가되고 있다.
고전적 극작 규범에 대한 그리보예도프와 푸쉬킨의 자유로운 태도와, 그들 작품에서 나타나는 모순적이고 고립된 개인-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이성의 담지자가 아닌-은 러시아의 낭만주의 드라마에 대해 거론할 수 있게 한다. 현실에 대한 사실주의적인 태도와 구체적인 묘사가 이들 드라마를 사실주의 극으로 정이하게 하기도 하지만, 19세기 후반에 등장하는 사실주의드라마와 비교해 볼 때 그리보예도프와 푸쉬킨의 극작은 낭만주의 정신에 더 충실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 드라마사에서 낭만주의 드라마의 더욱 분명한 예시는 레르몬또프의 희곡이다. 개인적 의식의 비극이나, 주인공의 열정에 대한 예민하고 날카로운 표현과 같은 낭만주의 드라마의 일반적인 특징들이 레르몬또프의 극작품들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죄 없는 아내에 대한 의심, 모욕당한 신의(信義)와 질투심이 작품을 움직여 나가는 동력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레스몬또프의 대표작 [가면 무도회]는 셰익스피어의 [오델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또한 당대 비평가들은 [가면 무도회]를 곧잘 [지혜의 슬픔]과 유사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는데, 이는 차쯔끼의 신랄한 독설을 떠올리게 하는 상류 사회에 대한 아르베닌의 조소나, 파무소프 세계와 차쯔끼의 대립이 상류 세계를 상징하는 가면 무도회와 아르베닌의 대립과 유사한 데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제까브리즘의 구현으로 평가되는 차쯔끼와, 제까브리스트 봉기 실패 이후 세대인 아르베닌은 분명하게 구별된다. 겸손하지만 소리내어 자신의 불만과 바람을 전달하던 20년대의 주인공은 이미 정신적으로 피폐하여 무위의 숙명에 처한 30년대의 주인공으로 교체 되어 있는 것이다. 낭만주의적 주인공 아르베닌이 보여 주는, 고립되어 비대해진 의식과 신과 세계에 대한 오만한 이성이 아내의 독살과 광기로 귀결될 때 한 가정의 비극은 인류 보편적인 의미를 지닌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비극으로 고양된다.
[가면 무도회]는 푸쉬킨의 [보리스고두노프], 그리보예도프의 [지혜의 슬픔]과 마찬가지로 당대 레퍼토리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는 당시 검열에 의해 이 희곡들이 상연 금지되었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극장들을 메우고 있던 통속적이 보드빌과 멜로드라마에 익숙해있는 관객들, 그리고 이미 상투적인 것이 되어 버린 낡은 극작 규범으로만 극작의 재능을 평가하려고 하는 비평가들 모두가 러시아 극문학 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알렉산드린스키 극자에서 초연된 고골의 [검찰관]은 관객들과 비평가들의 상당한 관심을 끌며 동시에 매우 특별한 작품으로 받아들여졌다. 고골 자신이 기록으로 남겼듯이[검찰관]의 공연을 본 당시 관객들은 정말 웃기고 재미있는 연극이지만 먼가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이처럼 어리둥절해 있는 관객들에게 비평가들은 발단도 결말도 없는 도대체 있을 법하지 않은 사건을 그린, 결국 저열하고 시시한 작품에 불과하다는 해석을 내려 주었다. 그러나 [검찰관]은 결코 시시한 작품이 아니라 희극 작가로서의 고골의 성숙한 사고와 그 고유의 극 체계가 담겨 있는 희곡이다.
고골은 우선 전통적인 희극에 고유한, 복잡하게 얽힌 사랑인 결혼으로 맺어지는 사건 전개에서 탈피했다. 고골은 한결같이 사랑에 골몰해 있는 주인공들과 그들의 행복한 결혼으로 끝나는 희극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라 생각했다. 고골은 시작부터 한두 주인공이 아닌 등장 인물 전체를 끌어들이고 흥분시킬 수 있는 사건을 선택했다. 또한 그의 인물 전체를 끌어들이고 흥분시킬 수 있는 사건을 선택했다. 또한 그의 인물들은 이전의 전통적인 희극의 배역들과 달리 러시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러시아적인 인물, 즉 러시아의 사기꾼과 괴짜들이다. 물론 고골이 선택한 사건이나 주인공들은 그 생생한 사실성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모르게 과장되고 희화되어 있다. 이는 고골 창작 전반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지극히 세태적이고 그럴듯한 심리를 지닌 인물들이 기이하고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사건의 환영 속으로 끌려 들어감으로써 나타나는 그로테스크한 리얼리즘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1840년대에 들어서 뚜르게네프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격언극을 모델로 하여[식객], [얇으면 터지는 법]등 10여 편의 희곡들을 발표했다. 작가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그의 극작품들은 극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으나 오히려 산문에나 적당할 듯한 비극적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등장 인물들의 외적 행위는 약화되고, 반면 서정적이고 심리적인 요소가 강화되는 것이다. 그의 극작 전반에서 드러나는 이 같은 특징은 그의 마지막 희곡인 [시골에서 한 달]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 작은 침묵으로 단절되는 인물들의 장황한 대사는 그들의 내밀하고 복잡한 심리를 드러내며, 사건은 외적으로 발전하지 않고, 분명치 않은 암시에 의해 은밀하게 전개된다. 한편 주인공 벨랴예프는 40년대 이후 러시아에 새롭게 출현한 인탤리겐찌야나 니힐리스트의 형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런데 [시골에서 한 달]은 70년대 초까지 검열에 의해 제대로 상연되지 못했고 그 이후에도 그리 성공적으로 상연되지 못했다.
19세기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러시아 극문학에는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났다. 잡계급 지식인, 소시민, 상인들이 새로운 관객층을 형성하게 되면서 이들은 무대 위에서 귀족들의 삶이 아닌 자신들의 삶을 보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새로운 관객층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새로운 극작가가 등장했다. 그가 바로 러시아 국민극의 창시자로 불리며 극작 에만 전념한 오스뜨로프스끼다. 고귀한 신분을 가진 소수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닌 지방의 지주나 하급 관리, 소상인, 소시민들의 평범하고 사소한 이야기들을 묘사하고 있는 그의 희곡들은 지금까지 귀족이나 인텔리겐찌야의 묘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러시아 삶의 진정한 드라마로 평가된다. 인간의 훌륭한 본성을 각성시키는 데에 극작가의 임무가 있다고 생각한 오스뜨로프스키는 이를 위해서는 관객들을 우울하게 하 것이 아니라 즐겁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수많은 희극들이 풍자적이고 폭로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평범하고도 긍정적인 정서를 드러낸다는 사실은 이러한 작가의 계몽적 의도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일반적으로 세태 희극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그렇듯 오스트로프스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개성적인 인물이라기 보다는 그들이 처한 사회적 환경을 반영하는 전형들이다. 그러나 오스트로프스키의 대표작 [뇌우]의 여주인공 까쩨리나는 단지 유형적인 인물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사회평론적 문학 비평이 가했던 당시 새로운 인간상에 대한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까쩨리나는[뇌우]를 평범한 세태극을 넘어서는 비극으로 고양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 [뇌우]에서 까쩨리나의 순수하고 자유로운 열정은 까바노바로 대표되는 관습과 규범의 세계와 충돌한다. 여기서 까쩨리나는 결국 까바노바의 세계와 타협하지 않고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 발단, 전개, 위기, 절정, 파국이라는 고전적인 5막극의 전개 방식에 충실하게 따른 사건 전개도 비극으로서의 [뇌우]의 완성도를 더욱 높여 주고 있다.
[전쟁과 평화], [안나 까레니나]등을 비롯한 크고 작은 소설을 남기며 세계 문학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소설가로서, 또 [삶에 대하여], [참회] 등을 저술한 사상가로서 유명한 똘스 또이는 미완성의 초고들을 포함하여 16편의 희곡을 남겼다. 그러한 그가 80년대의 이른바 회심 이후에 극작에 전념했다는 사실은 그의 희곡의 성격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회심 이후 그는 예술의 궁극적인 목표가 종교적 자각과 사해 동포주의에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예술의 목표를 수행함에 있어 드라마가 가장 영향력 있는 장르라고 판단했다. 똘스또이에게 있어 무대는 강단, 즉 도덕적 교육의 장소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공간이며, 종교적 자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장소였다. 그의 희곡에서 중세 신비극이나 기적극의 요소가 발견되는 것도 드라마에 대한 이와 같은 사고와 관련된다.
그의 대표작 [어둠의 힘]에는 제목에 부가된 <발톱만 걸려들어도 새 몸뚱이 전체가 빠져 든다>란 에피그램과 성경 구절에서 인용된 제사(題詞)가 시사하듯 빛과 어둠, 선과 악의 대립이 관통하고 있다. 극의 외적 행위는 주인공 니키타를 둘러싼 죄, 곧 어둠의 힘의 강화로 진행되고, 반면 내적 행위는 니키타를 둘러싼 죄, 곧 어둠의 힘의 강화로 진행되고, 반면 내적 행위는 니키타 내부의 빛 곧 양심의 저항으로 진행된다. 특히 그그이 마지막 장면에서 자살을 결심했던 니키타의 참회와 갱생은 톨스토이가 추구한 극작의 미학적 기능을 충실히 수행한다.
체호프는 톨스토이와 거의 같은 시대에 극작가로서 활동했다. 그러나 체호프의 극작은 톨스토이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다. 체호프의 극작품들에는 톨스토이가 강조하던 날카로운 갈등과 투쟁의 조건이 결여되어 있으며 또한 작가의 의도도 드러나 있지 않다. 초연에서 실패한 [이바노프], [갈매기]를 비롯한 그의 희곡들은 뚜르게네프의 드라마에 대한 평가와 유사한, 상연에 적합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1898년 모스크바 예술 극장에서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출에 의해 상연된 [갈매기]가 성공을 거두기 시작하면서 체호프는 극 작가로서 명성을 얻게 된다. 체호프의 드라마는 극적 사건의 부재, 말과 행위의 괴리, 내적 흐름 등을 특징으로 하며 개인의 심리주의 드라마에 국한되지 않는 작가 고유의 객관주의를 포괄하고 있다. 특히 체호프의 마지막 희곡[벗나무 동산]에는 그 주인공들의 삶이 그렇듯 이미 상투적인 것이 되어 버린 과거 극작의 전통에 대한 향수와 기억, 그리고 새로운 드라마 시학의 가능성이 교차하고 있다. 모스크바 예술 극장의[갈매기]상연 시 극작의 혁신을 주장한 뜨레플레프 역을 맡았던 메이에르홀드가 아방가르드 연극의 대표적 연출가였던 반면, 체호프의 희곡을 그 혁신적인 요소보다 심리적 사실주의 극으로 연출한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전통적인 연극의 대표적 연출가였다는 사실은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궁극적으로 체호프의 드라마는 그를 세계 연극사에서 현대극의 정초를 세운 극작가로 부상시킨다. 이제 17세기 서구 무대극의 모방으로부터 성립되었던 러시아의 극문학은 독창적인 러시아의 드라마를 창조하려는 여러 극작가들에 의해 세계 극예술의 경향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