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국민들에게있어 전 국토가 들썩이게 요란한 명절은 아무래도 매년 1월 1일, 즉 새해(노브이 고드, новый год)와 3월 8일, 여성의 날(보시모버 마르따)이다.
게중에 새해의 러시아는 축제 그 이상이다. 이는 도시뿐만 아니라 시골 구석구석에 까지 영향을 미친다. 빠르면 10월경부터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지고 사람들 손에는 가족에게 줄 선물이 들려져 있는것을 흔히 보게 된다. 더군다나 새해에 길게는 10일 이상의 황금연휴가 지속되기에 러시아인들은 마음놓고 신년을 즐긴다.
신년기간 러시아의 비즈니스 업무는 거의 올스톱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한때는 병원 응급실을 제외한 모든 서비스업들 역시 업무를 중단했으나 현재는 대도시에 한정되긴 하지만 다양한 놀거리와 먹거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1월 1일을 사이에 두고 전 일주일과 후 일주일은 러시아에서 연중 가장 많은 소비가 일어나는 기간이다. 선물류과 관련된 서비스업들은 새해를 앞두고 한 두달 전부터 다양한 상품들을 내놓기에 바쁜 때이다. 참고로 러시아 언론사들의 추산으로 새해 전후로 풀리는 금액은 매년 15억 ~ 20억 달러라고 한다. 가계형편이 높건 나쁘건 간에 쌈짓돈이 한꺼번에 풀리는 기간인 셈이다.
새해는 연중 가장 많은 소비가 일어나는 시기이자 쌈짓돈이 풀리는 시기
러시아인들은 선물 주고 받는 것을 좋아한다. 남의집에 갈때 빈손으로 가는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이다. 더군다나 러시아인들의 민족의 명절인 새해시즌에 선물이 오고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전통이자 관례로 생각된다. 극단적으로 말해 새해에 선물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가족이 없거나 이웃이 없는 사람이라고 봐도 크게 이상할 것이 없다. 이는 극빈자이거나 재벌이거나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이다. 다만 우리가 설날에 선물세트로 대표되는 상징적인 선물을 주로 주고 받는다면 러시아에서는 가족 구성원 하나하나에 맞게 선물을 주고 받는다. 어찌보면 구성원에 맞게 선물을 고르는 귀찮은 과정이 수반되지만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신의 성향을 감안해 주는 선물이니 더욱 뜻깊을 수 있는 그네들만의 습성이다. 선물을 살 수 있을만한 경제력이 전혀없는 경우에는 정성을 선물한다. 어린아이들이 이런경우에 속하는데 아이들은 의례적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학교에서 배운 종이트리 장식을 어른들에게 선물한다.
신년 연휴가 시작되기 직전에 가장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은 선물가게도 아니요 공연장도 아니다. 바로 식료품점이다. 현재 모스크바 등의 대도시에는 대형 마트들이 그런곳이겠다. 무슨 뜬금없이 식료품점이냐 하겠지만 러시아인들의 오래된 습성중에 하나가 신년 연휴에 가족들이 먹을 음식과 음료를 미리 사놓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관습은 새해 연휴기간에 문을 여는 가게들이 별로 없었던 시절에 파생된 것이지만 아직까지 이러한 관습은 유효하다. 특히 새해를 맞이하기 1시간 전후로 한상 가득 채워진 음식 앞에 가족들이 모여 새해를 맞이하는 러시아인들의 전통상 식료품을 미리 사다놓는 것은 새해를 맞이하는데 있어 중요한 일정인 셈이다.
새해가 시작되기 전 5분 안팎의 대통령의 신년 인사가 TV전파를 통해 전국에 울려퍼지고 신년사가 끝나자마자 울려퍼지는 장엄한 러시아 국가와 불꽃놀이가 시작되면 거리의 시민들과 각 가정의 일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샴페인을 터트리고 덕담과 함께 선물을 주고 받는다. 동시에 러시아 전역에서 일가친척과 지인들끼리 주고받는 전화 통화량이 한꺼번에 급증한다. 평소에 잘 터지던 휴대폰이 새해 전후로 1시간 가량 불통이 되는 현상도 이때 발생한다. 다만 영토가 넓은 러시아의 특성상 녹화방송으로 지역 시간에 맞게 방송된다. 참고로 러시아 영토에서 가장 먼저 방송을 보게되는 곳은 이르쿠츠크 지역이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2012년 신년사
보드카의 나라, 알콜 소비량 또한 연중 최고의 시기
대충 의례적인 행사가 끝이나면 모여있는 가족들과 지인들은 음주가무를 시작한다. 이는 거리나 집이나 마찬가지이다. 자정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전정한 하루가 시작하는 셈이다. 물론 어린 아이들에게는 들어가 잘것을 권유하긴하지만 평소처럼 엄격하게 대하지는 않는다. 아이들도 새해를 즐겨야하며 이렇듯 행복한 풍경을 보고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모인 식탁에는 3~4 종류의 알콜음료가 비치된다. 게중에 반드시 준비해야 되는 것은 역시나 보트카이다. 맥주에 밀려 국민음료라는 말이 무색해지긴 했지만 러시아의 전통 명절에 보드카는 빠질 수 없는 주류이다. 사람들은 보드카 몇 잔(러시아 스타일로 따지자면 한번에 3잔)을 마시고 슬슬 취기가 오르면서 평소에 갈고 닦은(?) 장기자랑 시간이 시작된다. 춤을 잘 추는 이는 춤을 춰서 분위기를 돋우고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노래를 부른다. 자신이 아는 노래라면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불러도 무방하다. 러시아인들에게 있어 다른 사람이 노래를 부를때 따라부르는 것은 흉이 아니다.
시끄러운 새해 분위기가 부담스러운 러시아인들은 조용히 TV를 지켜본다. 러시아 방송들 역시 평소보다 3시간 가량 더 방송시간을 연장하며 특별방송을 내보낸다. 러시아 국민들은 대체적으로 공영방송인 '에르.떼.에르' 나 최대 민영방송인 '엔.떼.베' 혹은 '오.에르.떼'를 선호한다. 왜냐하면 이들 3사에 러시아 최고의 스타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대부분 사전 녹화방송이다). 새해시즌 축하쇼에 빠지니 않는 국민가수 알라 뿌가쵸바 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 내놓라 하는 모든 스타들이 출연해 자신의 히트곡을 부르며 국민들을 흥겹게 한다. 우리나라와 조금 다른 풍경은 러시아의 스타 코미디언들이 출연해 우스게소리 하는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처럼 집단 MC들이 나와 농담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1인 혹은 2인이 출연해 정치풍자나 성대모사들을 통해 러시아 국민들의 배꼽을 쥐게 만드는 것이다.
'신년에 이 영화를 안보면 새해가 아니다. 운명의 아이러니!'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에도 새해 전후로 다양한 최신 영화들이 방영되곤 한다. 하지만 여기서 러시아적인 특징을 하나 찾자면 러시아의 새해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매년 브라운관에서 볼 수 있는 영화가 있다.
바로 '운명의 아이러니(즐거운 목욕되세요 : Ирония судьбы, или С лёгким паром!)'라는 제목의 영화이다. 이 영화는 매년 러시아의 새해만되면 반드시 방영되는 영화이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설날 혹은 추석시즌의 성룡 출연영화 혹은 나홀로 집에 시리즈와 같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현재는 성룡영화나 나홀로 집에 시리즈도 명절에 보는게 흔한일은 아니게 되었지만. 대체적으로 에르.떼.에르에서 방영되는 것이 정석이지만 다른 방송사에서도 날짜를 달리해 방영을 하곤한다.
운명의 아이러니는 1975년에 발표된 작품으로써 배경은 당시 소비에트 공화국 시절의 러시아다. 영화는 러시아 도처에 건설된 개성없이 똑같은 모양의 아파트들이 있다는 것을 모티브로 한 청년의 실수와 이를 계기로 전개되는 좌충우돌 사랑찾기 여정을 담고 있다.
37년전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소련) 시절 제작된 이 영화는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로맨틱 코메디와 비슷한 형식으로 전개되며, 헐리우드의 그것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는 탄탄한 구성을 보여준다. 특히 극중 여주인공인 '나댜'가 영화에서 립싱크로 부른 노래는 러시아의 국민가수, 알라 뿌가쵸바의 목소리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의 OST는 지금도 러시아에서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2007년에 리메이크작이 개봉했지만 그다지 큰 호응은 얻지 못했다.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남자 주인공 '제냐'는 새해 풍습대로 친구들과 함께 사우나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술에 취한 채 원래 자신의 목적지였던 모스크바가 아닌 쌍뜨 뻬쩨르부르그(상트 페테르부르그, 세인트 피터스버그)행 비행기를 타게된다.
술이 안깬 제냐는 뻬쩨르부르그에 내리자마자 택시를 타고 습관적으로 자신이 가려는 주소를 불러주고 잠에 빠진다. 공교롭게도 뻬쩨르부르그에는 제냐가 가려는 주소와 똑같은 이름의 거리가 있고 똑같은 집주소의 아파트가 있다. 더더군다나 같은 모양의 아파트에 방 호수는 물론이거니와 열쇠마저 똑같다.
그 아파트에는 애인과 오붓하게 새해를 맞으려는 미모의 여성 '나댜'의 집이다. 그녀는 이 술에 취한 불청객 때문에 곤란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운명의 아이러니로 마주치게 된 두 사람은 서로 티격태격 하는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싹트게 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줄거리 흐름이다.
러시아의 새해는 사건사고도 많은 시기
자 여기까지가 일반적인 러시아인들의 밝고 활기찬 새해 풍경이라고 한다면 이제부터는 다소 우발적으로 나타는 새해 풍경을 몇 가지 이야기 해보자. 이 우발적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음주와 연관이 있다.
술이라는 것은 평소에는 다양한 사유들로 인해 자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다음날 일터로 출근도 해야하고 학업도 이어가야 하며 자신의 건강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새해 연휴에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러시아인들 중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새해 연휴를 어떻해서든지 흥겹게 보내야 하기에 주량이 많고 적고를 떠나 과음을 하게 마련이다. 러시아 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에서 나타나는 새해벽두에 벌어지는 사건사고가 여기에서 시작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얌전한 술버릇이 취하면 자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겨울철 러시아에서 술취한채 잠든다는 것은 그리 큰 미덕은 아니다. 아니 피해야할 습관 중에 하나이다. 왜냐하면 집이 아닌 외부에서 술에 취한채 거리에서 잠이들게 된다면 십중팔구는 생명이 위태롭게 되기 때문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얼어죽는다는 말이다. 러시아 통계를 보면 겨울철 동사자의 상당수가 새해에 발생한다. 술에취하고 분위기에 취해 가장 행복해야 하는 날에 변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정도 취기가 있고 사람들이 상당수 몰려있게 되면 크고작은 시비가 벌어지곤 한다. 더불어 폭죽놀이 등이 너무나도 당연히 생각되는 새벽시간이기에 도심에 화제나 주먹다짐 등의 드잡이가 빈번하게 벌어지곤한다. 러시아 정부는 새해맞이 시간에는 평소보다 3배에 가까운 경찰 병력을 투입해 이러한 사태들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노력한다. 한때는 술취한 취객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주는 '산타경찰' 제도를 마련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가족을 가정에 안전하게 돌려보내주자는 취지였다.
몇 가지 러시아 새해 풍경을 나열해봤다. 우리가 보기에 좋고 나쁘고 이상하고를 떠나 러시아인들은 지금 연중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앞서말했듯이 새해만큼 러시아라는 나라가 이만큼 들떠있는 시즌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러시아인들의 이러한 성향은 우리나라의 문화와 어느정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평소에는 표정없이 쌀쌀맞아 보이지만 친해지고 나면 서로에 대한 존경과 배려가 넘쳐난다는 것도 일견 비슷해보이고, 어른 특히 여성을 존중하고, 사람을 좋아하며 술을 좋아하고 노래와 춤을 즐긴다. 더불어 서구의 그것에 비해 보다 우리와 근접한 가족문화도 존재한다. 양국민이 상대방의 문화에 대해 조금만 배경지식이 있다면 가장 친교를 이루기에 수월하다는 소견이다.
참고로 러시아인들이 새해만 되면 찾아서라도 보는 영화 '운명의 아이러니' 전체 영상을 상-하로 나누어 올려놓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위 영상은 러시아어 자막입니다. 영문 자막으로 보시고 싶으시면 모스필름 유튜브 페이지를 방문해보시기 바랍니다. 운명의 아이러니 외에 다양한 러시아 영화를 영문자막으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