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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역사 다이제스트 - 대제국 러시아로의 여정

러시아 2프로 부족할때

by 끄루또이' 2011. 11. 30.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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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를 특징짓는 가장 주요한 구분법은 이 국가가 세계에서 가장 넓은 국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흔히 지구 육지의 1/6에 달한다고 말하지만 현재 러시아 연방공화국으로만 한정지으면 약 1/7.5이다. 비율의 차이를 둔다고 하더라도 지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점유한 국가임에는 틀림없다. 동서로 약 1만km, 남북으로 약 4,000km에 걸쳐 뻗어있는 러시아는 유라시아 대륙의 40%에 달한다. 이러한 영토의 넓이는 미국과 중국을 합친 것보다 크며 우리나라 남북한을 합친 영토의 100배에 달한다. 영토내에서만 시차가 15시간에 이르는 러시아는 그야말로 '광활한 영토'를 가진 국가인것이다. 

러시아 영토의 특징이라면 끝없이 이어진 대지라고 할 수 있다. 우랄산맥이 아시아와 유럽을 구분하는 것을 제외하고 서쪽 발트해 연안에서 동쪽의 태평양 연안까지 산다운 산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랄산맥도 해발 500m 이하의 낮은 산맥으로 구분된다. 몇몇 강들을 제외하고는 영토내 대부분이 평원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이 블로그의 명칭이 '끝없는 평원의 나라로의 여행'인것이다. 

여느나라가 그렇듯이 러시아 역시 원래부터 이렇듯 드넓은 국토를 가진것은 아니었다. 러시아가 단일 정부체제를 보인것은 18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이며 이전까지는 여러공국의 연합체 형태였다. 특히 산림을 주거지로 한 체제와 강을 중심으로한 체제간 반목과 화합의 연속이었으며 폴란드와 헝가리등 외세의 간섭이 심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던차에 1237년 칭기스칸의 전사들 타타르족(몽골)의 침입은 러시아에 고난의 시기를 도래하게 만들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통일 러시아의 기틀을 마련해준 기회이기도했다. 당시 세계의 평원을 휩쓸던 타타르족은 12만의 기병을 동원해 2년여에 걸쳐 거의 전 러시아를 초토화시키며 위세를 보였었다. 러시아 공국 연합체 성격의 키예프 루씨(키예프 루시, 고대 러시아를 지칭)의 여러 도시국가들은 타타르족에 용감히 맞섰으나 잘 훈련된 타타르족의 위세를 당할수는 없었다. 하지만 당시 고만고만한 도시국가였던 모스크바 공국은 타타르족과 싸우기보다 조공을 바치고 화평을 맺는 동시에 여러 러시아 공국들에게 세금을 징수할 권리를 얻어내는 등 타타르족의 침공 이후 거의 유일하게 이전보다 발전하게된다. 더불어 정복자 타타르족(카잔한국)의 인정아래 모스크바 공국은 주변 공국들을 침략해 비약적인 영토확장에도 성공하게 된다. 결국 키예프 루씨는 모스크바 공국이라는 단일국가형태로 변모하게된다. 

이반 3세

 
하지만 1462년 타타르족의 군사력을 활용해 세력을 넓혀오던 모스크바 공국에 패기넘치는 지도자이자 대러시아 대공의 지위를 획득한 이반3세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이반3세는 다소 약화된 타타르족의 위세와 모스크바 공국의 힘을 저울질하며 타타르족을 '자신의 영토'에서 몰아내기로 결심하게 된다. 타타르족의 비호아래 번성하던 모스크바 공국을 하루아침에 몰락하게 할수도 있는 결정이었지만 성공하면 자주적인 슬라브민족 단일국가를 형성할 수 있는 기로였다. 

이반3세는 냉혹하고 잔인한 면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매우 영리했다. 타타르족을 몰아내기위한 포석으로 비잔틴제국의 황실과 정략결혼을 하고 동맹의 결속을 공고히하기 위해 비잔틴 제국의 상징인 쌍두독수리를 국가 문장으로 채택(이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하고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공표한다.

더불어 대외적으로 모스크바 공국의 위상을 알리기위해 특별한 건물을 구상하게된다. 이를 위해 이탈리아의 여러 유명 건축자들을 러시아로 초빙해서 현재 끄레믈(크램린) 내에 위치한 우스펜스키 성당(성모승천대성당)을 건축하게 된다. 우스펜스키 성당은 기본적으로는 러시아식 성당의 외형을 띄고 있지만 그 내부는 이탈리아식 건축방식으로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게된다. 우스펜스키 성당을 완성함으로써 권력의 상징물을 획득한 이반3세는 대외에 타타르족과의 단절을 선포하게된다. 

이반3세의 이러한 선언은 타타르족의 즉각적인 군사적 보복에 직면하게된다. 늘 그렇듯이 타타르족은 군대를 이끌고 모스크바를 향해 침공을 개시한다. 이반3세 역시 군대를 이끌고 나가 모스크바 서쪽 우그라 강에서 대치하게 된다. 예전같으면 상대가 안되는 전쟁이었겠지만 이전과 달리 준비가 잘된 러시아의 군대는 몇달 간의 교전끝에 승리를 거두게된다. 이는 러시아 역사에 300년 간에 걸쳐 러시아를 종속시켰던 타타르족을 물리치고 압제에서 해방된 위대한 승리로 기록되며 이반3세를 러시아 역사 최초의 대제로 부르는 근거가 되었다. 

이반3세 제위기간 중 타타르의 압제에서 벗어나고 이전에 비해 모스크바의 영토를 3배(3만 9천 km -> 11만 7천km) 가까이 넓혔음에도 모스크바 공국으로 대표되는 러시아는 제국의 면모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저 독립국가의 지위를 획득한 비교적 넓은 국가였을 뿐이다. 더군다나 기세가 한풀 꺽이기는 했지만 300년간 슬라브민족을 압제했던 징기스칸의 후예들은 여전히 위협의 대상이었다. 러시아가 제국이 되려면 동쪽 카잔에 버티고 있는 카잔한국을 우선적으로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반 4세

 
러시아가 제국의 기틀을 세우게 된것은 이반3세의 손자 이반 4세, 소위 이반 그로즈느이(Иван Грозный, 이반뇌제, 이반 더 테러블)라고 불리우는 인물이 제위에 오르면서부터이다.

잔인하고 가학적이었지만 명석한 정복군주의 면모를 가지고 있던 이반 그로즈느이는 신탁에 의해 황제가 되었다고 대외에 선포했으며 러시아 역사에서 처음으로 짜르(Царь, 차르)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지도자였다. 짜르는 황제를 뜻하는 시저(카이사르)의 러시아식 발음이다.  

이반 그로즈느이는 짜르가 되면서 타타르족의 본거지인 카잔을 정복할 계획을 세우게된다. 이전까지 양국의 전쟁은 기병과 보병의 평원에서의 힘대힘 싸움이었지만 이 영악한 황제는 유럽식 공성기술을 러시아식으로 변환한 진일보한 형태의 공격수단을 구비한채 카잔으로 진군한다.

당시 등장한 것이 기마병이 주축을 이루는 타타르족의 싸움방식에 대비한 굴랴이 고로드(Гуляй-город, 움직이는 도시라는 의미)등의 수단이다. 외부에서는 저격하기 힘들지만 내부에서는 외부의 적을 효과적으로 타격할 수 있었던 이 이동식 진지(요새)는 양국 싸움에 등장한 최신식 전쟁도구로 현대전의 탱크에 비견될 정도로 성과를 거두었다. 더불어 돌담으로 둘러쌓인 카잔을 공격하기 위해 8m에 이르는 공성용 이동요새도 동원된다.

무기 및 수적으로 열세에 놓여있던 타타르족이 농성에 들어가자 이반 그로즈느이는 결국 지하땅굴을 활용해 카잔성문을 폭파시켜버리는 과감한 작전을 펼쳐 기어코 카잔을 함락시키고 러시아 영토에 편입시켜버린다. 이 사건으로 과거 300년 간에 걸친 지배자와 피지배자 관계가 역전되었고 러시아가 카스피해와 시베리아로 급격히 영토를 넓히는 계기가 되며 드디어 제국의 전초단계에 이르게 된다. 

러시아 역대 지도자들이 그랬듯이 이반 그로즈느이는 이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위대한 건축물을 만들기 바랬고 이때 탄생한 것이 러시아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성 바실리 성당(Храм Василия Блаженного)이다. 
 
47m높이의 바실리 성당은 각기 다른 모양의 양파모양 중간탑이 주위를 둘러싸고 그 사이에 다시 네개의 작은 탑이 위치해 총 9개의 탑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당은 얼핏보면 각기다른 높이의 탑들이 탑들이 불균형스럽게 제멋대로 몰려있는 것처럼 보이지만이러한 부조화가 하모니를 이루는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유명하다. 사원을 구성하고 있는 9개의 탑은 각각이 독립된 공간이기에 탑과 탑은 비좁은 계단과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1555에 건축이 시작되어 1561년에 완성된 성당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들인 뽀스또닉(포스토닉) 야꼬블레프와 바르마에 의해 설계되어 지어졌다. 통일된 러시아의 자부심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동시에 국민의 신앙심과 애국심을 북돋기 위해 지어진 종교적, 상징적 건축물이다. 원래 붙여진 명칭은 성모탄생 사원이었으나 이반 그로즈느이가 선호하던 바실리 성인의 이름을 붙여 최종적으로 성 바실리 사원으로 명명되었다. 

바실리 사원은 드라마틱한 역사적 요소도 가지고 있다. 

성당 건축을 지시한 이반 그로즈느이에 기인한 것으로 이반뇌제는 이 훌룡한 건축물이 러시아 외 다른나라에서 지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건축가인 뽀스또닉과 바르마의 눈알을 뽑아내 장님으로 만들어 이러한 우려를 미연에 방지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바실리 사원의 아름다움에 반해 건축가들을 영국으로 보내줄것을 요청했고 평소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호감이 있던 뇌제는 거절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다른나라에 같은 건축물이 들어서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행한 행동이라고 한다. 극단적인 공포정치를 시행하던 이반 4세를 수식하는 러시아어 '그로즈느이(Грозный)'가 왜 붙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로즈느이는 우리말로 옮기자면 '무서운(사람), 끔찍한' 이란 의미이다. 
  
 

15세기에 제작된 '굴랴이 고로드'를 형상화한 그림 


이반 그로즈느이 치세때 러시아는 활발히 영토를 넓혔었다. 당시 러시아는 볼가 강과 유럽 그리고 시베리아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유럽에서 가장 큰 국토를 지닌 국가가 된다. 하지만 문제는 이반4세의 사후에 다시 발생했다.

황태자였던 자신의 아들을 순간의 광기에 사로잡혀 살해하는 광폭한 성정을 바탕으로 극단적 공포정치를 펼치던 이반 그로즈느이가 1584년 세상을 떠나자 러시아는 후계자 싸움으로 100년간의 암흑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 기나긴 시대는 제국 러시아의 근간을 흔들어버려 속빈 강정으로 만들었으며 이반 3세 이전의 러시아로 분열될 조짐을 보이게 된다.

하지만 위기에 영웅이 등장하듯이 러시아에 전무후무한 위대한 짜르가 등장하게 된다. 그가 바로 뾰뜨르 삐에르브이(Пётр I), 즉 뾰뜨르 대제(뾰뜨르 1세, 표트르 대제, 피터 1세)이다. 앞서말했듯이 러시아가 통일된 대제국의 면모를 보인것은 바로 이 황제의 출현과 무관치않다.

뾰뜨르 대제는 자타가 공인하는 명석하고 총명한 인물이었으며 근면성실했다. 더불어 그는 2m에 이르는 거구의 인물로 외모부터가 주변을 압도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대제는 신분을 숨긴채 당대 최고 조선술을 가진 바다의 패자 네덜란드로 사신단과 함께 넘어가 조선술을 직접 배워왔으며 유럽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러시아에 주입한 계몽군주였다.

더불어 슬라브민족의 강렬함이 남아있던 모스크바를 포기하고 유럽으로 향한 바닷길 진출을 위해 새로운 수도의 필요성을 느끼고 모스크바에서 640km 떨어진 네바강변을 주목하게 된다. 당시 네바강변은 유럽강국 스웨덴이 버티고 있었다. 뾰뜨르 대제는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스웨덴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1700년에 드디어 네바강 연안의 영토를 획득한뒤 1703년에 쌍뜨 뻬쩨르부르그(페테르부르그)라는 계획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해 1712년에 드디어 천도하게 된다.

이 도시는 당대 최고의 유럽식 건축양식으로 건설되어 전혀 러시아스럽지 않은 도시가 되었지만 그 외양은 뾰뜨르 대제가 원하는 새로운 수도에 적합했다. 뻬쩨르부르그는 우리나라의 논밭처럼 좌우 대칭이 비교적 명확한 도시이다. 모스크바처럼 필요에 의해 자연적으로 넓어진 방추형 도시와는 전혀 상반된 느낌을 주는 계획도시인것이다. 

하지만 이 도시는 러시아 일반대중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도시이기도 했다. 늪지대 위에 세워질 이 도시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동원된 수십만의 러시아 민중은 자신의 옷가지에 진흙을 담아 옮기는 열악한 작업환경에 놓여있었으며 부족한 보급과 겨울철 추위로 인해 상당수의 인력이 사상하게된다. 정확한 통계는 나와있지 않지만 건설초기부터 1708년까지 2만 5천에 이르는 동원인력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렇게 러시아 민중의 희생하에 탄생하게 된 새로운 수도 뻬쩨르부르그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200년간 러시아의 수도 역할을 하게된다. 

뾰뜨르 대제는 활발히 영토확장을 하던 정복군주는 아니었지만 스웨덴과의 북방영토 싸움을 통해 발트해와 태평양 연안까지 국토를 늘렸으며 수도 뻬쩨르부르그에 해군성을 창설해 근대화된 해군력을 확충해 유럽 열강들이 무시할수없는 온전한 '제국 러시아'를 완성시키는 역할을 한다. 더불어 이전에 비해 외국과의 교역량을 7배이상으로 늘려 제국의 안정화에도 힘썼다. 

뾰뜨르 대제는 영리하고 근면성실한 인물이었으며 여러모로 솔선수범하는 계몽군주이기도 했다. 전대 러시아 지도자들처럼 대중의 희생을 강요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와같은 경향은 하급민들 뿐만아니라 귀족들에게도 적용된 것이었다. 나라는 부국강병을 이루었으나 러시아인들은 전대 황제의 공포정치와는 또다른 압박을 받고 있었다. 

뾰뜨르 대제는 죽음역시 드라마틱한 과정을 거친다. 물에 빠진 사공을 구하기 위해 얼음물에 뛰어든것이 원인이 되어 병을 얻어 사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뾰뜨르 대제 기념 조형물


뾰뜨르 대제가 제국을 완성했다면 안정화 시킨 인물은 러시아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여제'칭호를 받고 있는 예까쩨리나 2세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예까쩨리나2세는 러시아에서 태어난 토종 러시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는 독일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자란 독일인이었다. 

뾰뜨르 대제 사후 러시아 제국은 다소 정체된 형태로 이어지고 있었다. 더 나빠지지도 않았지만 더 좋아진 것도 없었다. 그러던 차에 뾰뜨르 대제의 손자인 뾰뜨르 3세가 즉위하게 되고 뾰뜨르 3세는 독일인 황후를 맞이하게 된다. 그녀가 바로 예까쩨리나2세이다. 

아이러니한것은 뾰뜨르3세는 어렸을때부터 외국에서 자라 러시아어를 거의 못하는 수준이었지만 독일출신 예까쩨리나는 러시아 왕족이 되면서 기절할 정도로 러시아어를 공부해 정교 성경을 외워 낭독할 정도였다. 이러한 그녀의 노력은 귀족과 평민들에게 호감을 주었다. 

안일한 왕족이었던 뾰뜨르3세에 비해 예까쩨리나는 야심만만한 인물이었고 자신의 야망을 실천하기 위해 남편이 권좌에 오른지 6개월만에 끌어내리고 1762년 본인이 왕좌에 오르는 실천력을 보여준다. 예까쩨리나2세는 스스로 뾰뜨르 대제의 후계자임을 공표하고 뾰뜨르 대제가 시작한 유럽화 사업을 완성시키는 역할을 하게된다. 슬라브주의를 배척하고 수도까지 옮겨가며 유럽문물에 매우 개방적이었떤 뾰뜨르 대제의 치세가 없었다면 예까쩨리나2세의 즉위 또한 없었을지도 모른다.  

예까쩨리나2세 치세기간에 러시아는 대제국의 면모를 보여준다. 당시 유럽 왕조들 및 신흥강대국들은 영토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예까쩨리나2세는 게중에 으뜸가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예까쩨리나2세는 넓어진 영토에서 이전에 비해 확연히 늘어난 재원을 확보하게 되고 이를 기반으로 유럽국가들과 어깨 높이를 맞추기 위한 근대화 사업을 활발히 벌인다. 제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건축물들 뿐만아니라 병원과 고아원, 학교등의 서민복지시설을 확충하는등 사회 안정화에도 노력했다.

예까쩨리나2세 치세기간의 가장 특징은 넓어진 국토만큼 많아진 도시들과 건축물들이었다. 예까쩨리나2세가 새로 만든 도시만 무려 216여개에 이른다. 뾰뜨르 대제가 쌍뜨 뻬쩨르부르그라는 기념비적인 유럽형 대도시를 만들었다면 예까쩨리나 2세는 이와 유사한, 규격화된 유럽형 중소도시들을 러시아 영토에 퍼트린 것이다. 

예까쩨리나2세는 뾰뜨르 대제의 후계자로 선제의 의지를 그대로 국가경영에 투영했지만 근본적으로 다른부분도 몇가지 존재했다.

뾰뜨르 대제가 농민이나 귀족이나 할것없이 국가를 위해 희생하길 강요했다면 예까쩨리나2세는 귀족들에게는 느슨한 태도를 취했다는 것이다. 예까쩨리나2세 자신은 농노제도의 폐지가 근대화를 가는 빠른 길이라는 것은 인지한듯 싶었으나 농노가 귀족재산으로 인식되던 당시, 귀족들과의 불편한 관계를 피하기위해 이는 성사시키지 못한다.   

더불어 재원이 늘어나면서 뾰뜨르 대제시절에는 극히 제한적이었던 왕족 및 귀족들의 화려한 궁정생활이 꽃을 피우는 시기이기도 했다. 예까쩨리나2세의 건축중독과 왕족의 호사스런 생활을 동시에 엿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겨울궁전이라고 할 수 있다. 겨울궁전은 현재 세계적인 박물관인 에르미따쉬(에르미타주)의 과거 원래명칭이다

예까쩨리나 2세

 
예까쩨리나2세 이후 러시아는 유럽의 강대국으로 자리를 공고히한다. 한때 미개한 야만족의 나라에서 힘과 권위 그리고 문화가 살아숨쉬는 국가로 완전히 환골탈태한 것이다.

19세기 초 러시아는 강국의 이미지를 넘어 유럽국가들의 중재자로 등장한다. 이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와의 전쟁승리가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예까쩨리나2세의 손자인 알렉산드르2세 시절인 1813년 유럽정복을 눈앞에 둔 나폴레옹은 50만의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로 진군한다. 이는 과거 징기스칸의 전사들이 러시아를 침략한데 이어 가장 위협적으로 다가온 외세의 러시아 영토 침략이었다. 나폴레옹은 진군에 진군을 거듭해 드디어 모스크바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나폴레옹은 이것으로 러시아를 점령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러시아는 애초에 나폴레옹과의 정면승부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기전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머나먼 곳으로 원정온 프랑스의 보급을 끊는것에 주력했다. 나폴레옹으로써는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보급품을 획득할것으로 생각했지만 러시아 짜르는 스스로 러시아 도시들을 불태우고 러시아의 정신적 수도인 모스크바의 상당부분을 직접 파괴함으로써 프랑스의 보급루트를 제거해버린다. 그리고 러시아군의 가장 큰 무기라 할 수 있는 기나긴 겨울이 오기를 기다린다.

이 작전은 제대로 먹혔다. 러시아의 혹한을 맞이한 나폴레옹은 러시아에서 더이상 얻을게 없음을 알고 퇴각하기에 이른다. 나폴레옹과 함께 러시아 영토를 밟은 프랑스 정예군은 50만이었으나 귀향길에 오른것은 게중에 10%밖에 되지 않았다. 유럽 대부분을 손에 넣은 나폴레옹으로써는 치욕적인 패배였고 기세가 꺽인 순간이었다. 러시아식 표현으로 이 '1차 대조국전쟁(2차 대조국전쟁은 2차세계대전을 말함)'에서의 기념비적인 승리는 러시아를 유럽열강의 정점자리에 올려놓게 된다.

이 위대한 전쟁의 승리는 러시아 민중의 희생을 밑거름으로 얻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가는 유럽의 정점을 점유했지만 하층민들의 삶은 과거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짜르에서부터 대부분의 귀족들은 그것을 당연시했고 이러한 이들의 안일한 선민의식은 후일날 전세계 역사에 영향을 끼치는 공산주의 혁명을 불러일으키는 도화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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