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를 상징하는 수많은 키워드 중에 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보드카이다. 러시아어 '물'이란 의미의 '바다(вода)'라는 단어의 지소형에서 유래된 이 주류는 누구나 알다시피 러시아가 원산지이며 러시아의 국민주(酒)라고 불리운다. 이러한 칭호는 전체 주류 소비량에서 맥주에 고전을 면치 못하는 현 시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며 러시아인들 뿐만 아니라 전세계인이 인정하는 부분이다.
투명 증류주가 인류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6~7세기 경이지만 러시아 보드카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이보다는 늦은 11세기(일부에서는 15세기)라고 알려져 있다. 다만 이후로 한참동안 보드카는 커튼 속에 가려진 비밀의 술이었다. 이는 보드카 제조법이 장인들 손에서 손으로만 내려왔으며 제조법 유출이 엄격히 금지되어 널리 퍼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더불어 대량 생산과도 거리가 멀었으며 알코올 함량 또한 40도에서 60도 까지 다양했다. 더불어 이 시대에서는 보드카보다는 러시아어 '곡주'라는 명칭이 보다 널리 쓰였었다.
오늘날과 같은 40도에 맞춰진 보드카 제조법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주기율표로 유명한 드미뜨리 멘델레예프에 의해서이다. 1865년 1월 31일 쌍뜨 뻬쩨르부르그(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멘델레예프는 물과 알코올 원액 혼합 양에 따라 보드카의 질이 현격하게 달라진다는 것에 착안하여 실험에 실험을 거쳐 이상적인 무색, 무미, 무취의 40도 보드카 제조원리를 발표했다. 이후로 보드카의 알코올 농도는 40도로 확정되었고 그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그래서 보드카의 실제나이는 얼추 1,000살에 가깝지만 현대에 제조되고 있는 보드카의 나이는 145세이며 매년 1월 마지막날이 비공식적이지만 명확한 생일이 되었다.
러시아 보드카 제조 장인이 아닌 대학자에 의해 보드카의 제조 원리가 확립이 된 것은 그만큼 보드카가 러시아인들 삶의 중요한 일부분이라는 것을 반증한다. 참고로 2009년 러시아 통계자료를 보면 러시아인 한 명이 연간 18리터의 보드카를 마신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판매되는 보드카가 0.5리터가 한 병임을 감안하면 1인당 36병을 마시는 셈이다.
한 가지 아이러니 한것은 러시아의 국민주 보드카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국가는 러시아가 아니라 미국이라는 것이다. 러시아와 발트3국, 스웨덴 등에서 보드카를 활발히 생산하고는 있지만 현재 미국에서 가장 많은 보드카를 생산하고 있으며 전세계 보드카 시장의 상당부분을 점유하고 있다. 더불어 보드카 최대 메이커인 '스미르노프' 역시 미국회사이다. 이 회사는 원래 러시아인 스미르노프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창립한 회사로써 한때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보드카 제조 메이커였지만 우여곡절 끝에 미국인에게 팔려나갔다. 이는 러시아인들에게는 다소 씁쓸한 사실이겠다. 다만 장삿속일망정 미국인들에게 보드카 제조술이 넘어간 이후 보드카의 세계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보면 오늘날 보드카가 이렇듯 널리 퍼지는데 미국인들이 크게 일조를 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현재 러시아는 자국 보드카 뿐만 아니라 해외 유수의 보드카 메이커들의 격전장이다.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수출규모가 월등이 높았던 것에 비해 200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수입이 수출을 상회하고 있다. 자본주의 논리를 떠나 단순하게 생각해도 연간 1인당 40병 가까이 보드카를 마시는 잠재적인 구매자들이 넘실대는 국가를 그대로 넘길 메이커들은 없기 때문이다.
과도한 알콜섭취는 알콜로 인한 수많은 장점을 상쇄하고도 남는 사건, 사고, 질병과 같은 병폐를 만드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러시아에서도 국민적 병폐라고 할 수 있는 알콜중독 등이 항상 문제로 제기되고 계몽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이와는 별개로 국민정서를 보면 보드카에 대해서만큼은 이상하리만큼 관용적인 면을 볼 수 있다. 러시아와 보드카, 이 뗄래야 뗄 수 없는 공생 관계는 공산주의 시절에 교육을 받은 세대가 사라지기 전까지 러시아 내에서 없어지지 않을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