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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시인 뿌쉬낀

러시아 문학과 예술

by 끄루또이' 2003. 7. 27. 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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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뿌쉬낀 탄생 200주년 기념 학술제" 를 준비한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들을 수집해서 몇 가지 주제로 나눠 발표를 했었습니다.   당시 자료 수집과 발표를 통해 감히 제가 느낀 것은 러시아 문학은 뿌쉬낀에서 시작되었고... 뿌쉬낀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 쎄르게예비치 뿌쉬낀'은 영국에 있어서의 셰익스피어, 이탈리아에 있어서의 단테처럼 러시아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이며 시인이다. 그는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확립자이며 19세기를 러시아 문학의 황금기로 만든 시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뿌쉬낀의 천재적 소질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러시아의 민족적 자각과 민주적 기운이 고조되는 가운데 꽃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역사적 시기의 국민사상과 감정의 최대 표현자가 되었고 러시아 국민문학의 창시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서구의 모든 문화유산을 몸소 받아들여 그것을 러시아의 풍토 위에서 꽃피게 하였으며 그 속에서 러시아의 국민성과 혼을 뚜렷하게 표현한 것이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인 고골리, 뚜르게네프, 도스또옙스키, 톨스토이 등 모든 작가들이 뿌쉬낀 없이는 생각할 수도 없을이만큼 그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의 후광처럼 언제나 빛나고 있다.

뿌쉬낀은 1799년 5월 26일 모스크바에서 퇴역장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오래된 귀족으로, 어머니의 증조부는 아브라함 한니발의 후예였으며 뾰뜨르 대제에게 인질로 보내진 유명한 「뾰뜨르 대제의 흑노(黑奴)」로서 대제의 총애를 받았다. 이 아프리카의 혈통을 이어받은 어머니는 러시아 사교계에서 「예쁜 혼혈녀」라는 평판이 자자했고 뿌쉬낀 자신도 고수머리에 거무잡잡한 얼굴, 조급한 성격, 생동하는 상상력 등을 타고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서재에서 문학과 철학 서적을 탐독하였으며, 12세 때에 짜르스꼬예 리쩨이( 귀족학교 )에 입학하였다. 재학중에는 시작(詩作)에 열중하여 많은 서정시를 썼는데, <짜르스꼬예 리쩨이의 회상> 같은 작품은 당대의 저명한 궁중 시인 제르쟈빈의 격찬을 받은 바도 있었다.

그는 학교를 졸업한 후 외무성 관리가 되어 팔등관(八等官)의 직위를 받았으나, 당시 정규 학업을 끝낸 귀족의 자녀들이 대개 그러듯, 그 역시 수도 뻬쩨르부르그에서 귀족들의 향락생활을 하였다. ( 이런 사정은《예브게니 오네긴》(제1장)에 묘사되어 있음 ). 그는 이 무럽에 주꼽스끼, 까람진 등을 위시한 당대 유명 문학 선배나 동료들과 교우하였으며, 나폴레옹 전쟁 후에 팽배했던 시대적인 풍조였던 자유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제까브리스트(12월당원)」들과 어울리면서 전제 정치를 공격하는 시를 쓰기도 하였다.

뿌쉬낀이 작가로서 첫발을 대디딘 것은 민화를 소재로 한 경쾌하고 대담한 구어풍(口語風)의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1820)의 출판 후의 일이었다. 그는 또 자신의 정치시 때문에 남 러시아로 추방되기도 했는데, 그는 남부 지방의 자연에서 강한 인상을 받고, 그 무렵 읽기 시작한 바이런의 영향을 받아 낭만적인 서시시를 여러 편 쓰기도 했다. 그가 뻬쩨르부르그의 추억을 담은 《예브게니 오네긴》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다. 그는 1823년 흑해의 항구 도시 오데싸로 옮겨와 활기를 되찾고 사교계에 드나들면서 셰익스피어를 비롯하여 이탈리아 작가들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관료적인 총독과 사이가 벌어지면서 미움을 사게 되어 관직을 박탈당한 후, 어머니의 영지인  미하일로브스꼬예에 무기한 추방당하고 만다. 그리하여 지루한 전원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무렵의 생활은 뿌쉬낀이 어릴 때 듣고 자랐던 농민의 상상의 세계와 힘찬 언어의 결정인 민간 전승의 세계로 그를 다시 이끌어 넣었다. 이 칩거시기에 그는 사극 《보리스 고두노프》를 완성하였다.

「제까브리스트의 반란」이 일어난 것은 1825년 12월 14일이었다. 이 사건으로 뿌쉬낀의 많은 친구들이 투옥되었으나, 그는 추방당한 몸이었으므로 다행히 체포되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새로 즉위한 니꼴라이 1세는 뿌쉬낀을 불러 그의 추방을 사면하여 주나, 그의 작품에 대해서만은 황제 자신이 검열관이 되겠다고 언명함으로써, 그 후 그가 하는 말은 낱낱이 관헌에 의하여 기록되고, 어디를 여행하든 일일이 허가를 받아야만 하였다.

1828년 12월 뿌쉬낀은 모스크바에서 16세의 아름다운 소녀 나탈리야 간챠로바를 만나게 되어, 다음해에 결혼을 신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는 실의에 빠진 채 까브까스 지방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으나. 1830년 모스크바에 돌아와 다시 그녀에게 구혼했는데, 이번에는 나탈리야의 어머니가 그의 가문이나 문명을 높이 사서 약혼이 성립되었다. 뿌쉬낀의 아버지는 아들의 결혼 선물로, 결혼 전 석 달 동안 보르지노 마을의 별장에서 편히 지내도록 했는데, 이 짧은 동안에 뿌쉬낀의 창작 활동은 절정을 이루게 된다. 이 무렵에 《예브게니 오네긴》이 거의 완성되었고 단편집 《벨낀의 이야기》를 비롯한 많은 희곡 작품과 서정시가 쓰여졌다.

1831년 2월 결혼 후, 뿌쉬낀은 주로 뻬쩨르부르그에서 살았는데, 그는 이 시기에 역사적 저작에 심혈을 경주하였다. 그러나 사교계에 빠진 아내 때문에 시간의 낭비는 물론이고 경제적인 곤란을 겪게 되어 그는 관리로 취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점차 부채는 늘어갔고 값진 물건은 죄다 전당포에 가 있었다. 이러한 고통은  뿌쉬낀이 죽기 전까지 계속되어 갔다. '나는 결혼하면 예전의 배쯤 경비가 더 지출될 것으로 알았는데, 열 배도 더 드네'라고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쓰고 있듯이, 저간의 곤궁을 짐작케 한다.

1833년 뿌쉬낀은 《뿌가쵸프 반란사》의 집필을 위해 취재 여행을 한 후 보르지노 마을에 머물면서 장시 《청동의 기사》를 썼다. 이것은 정치와 경제를 주제로 한 내용으로 원숙기에 접어든 시인의 뛰어난 작품이다. 1836년 뿌쉬낀은 문학잡지 〈사브레멘닉(동시대인)>을 발간하고 여기에 산문 걸작 《대위의 딸》을 실었다.

이 무렵, 뿌쉬낀의 미모의 아내 나탈리야가 러시아 기병대에 근무하던 프랑스 장교 조르쥬 단떼스와 가까워져 추문이 나돌게 되자, 전부터 뿌쉬낀의 반항정신을 질시하던 귀족들이 이 사건을 기화로 소문을 퍼뜨려 뿌쉬낀으로 하여금 상대와 결투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1837년 1월 27일 뿌쉬낀은 단떼스가 쏜 총탄을 맞고 37년 8개월의 짧은 생애를 끝맺고 말았다.

「제까브리스트 운동」과 관련된 애국주의 사상을 고취한 작품으로는 〈자유〉(1817), 〈농촌〉(1819),〈챠따예프에게〉등이 있으며, 추방된 유형지에서 쓴 《까브까스의 포로》(1820), 《도적의 형제》(1821) 등과 그 밖의 낭만적 서사시에는 현실에 대한 반항정신과 개성의 자유에 대한 주장이 표현되어 있다. 그후 뿌쉬낀은 추방의 고독한 생활 속에서도 비극 《보리스 고도노프》(1824∼25)를 비롯하여 사실주의적 작품을 남겼으며 제까브리스트의 체포를 동정하는 시 <시베리아로>(1827), <아리온>(1828) 등으로 밝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노래하기도 했다.


♣ 한국에서 유명한 뿌쉬낀의 시 두편 ( 원어와 같이 감상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나 그대를 사랑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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