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브로드스키 (Joseph Brodsky)
본명은 Iosip Aleksandrovich Brodsky로 1940. 5. 24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출생(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1996. 1. 28 미국 뉴욕 뉴욕시티.
러시아 태생의 시인.
1987년 중요한 서정적 비가(悲歌)들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5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그때부터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레닌그라드 문단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나 독립적 성향과 꾸준하지 않은 작품활동으로 소비에트 당국으로부터 '사회주의의 기생충'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1964년 5년간의 중노동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비중 있는 작가들이 이 판결에 이의를 제기한 덕택에 1965년 사면받았다. 1972년 소련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후 계속 그곳에서 살았고 1977년 미국시민권을 얻었다. 1972~80년에는 미시간대학교와 앤아버대학교의 거주시인으로 있었고 그밖의 다른 학교에서도 객원교수로 활동했다.
그의 시는 개인적 주제들을 담고 있으며 삶과 죽음, 존재의 의미 같은 보편적 관심사를 강렬하고 사색적인 필치로 다루고 있다. 러시아어로 쓰인 초기작품 가운데는 〈운문과 시 poem and poetry〉(1965)$〈황야의 정거장 stop in wildness>(1970)이 대표적이다. 이들 작품을 포함한 다른 작품들이 조지 L. 클라인에 의해 영역되어 〈시선집 Selected Poems〉(1973)으로 나왔는데, 특히 유명한 〈존 던을 위한 비가 Elegy for John Donne〉도 실려 있다. 러시아어와 영어로 쓰인 중요한 작품으로 시선집 〈연설의 일부 A Part of Speech〉(1980)$〈20세기의 역사 History of the Twentieth Century〉(1986)$〈우라니아에게 To Urania〉(1988)와 산문모음집인 〈1보다도 작은 Less than One〉(1986)$〈슬픔과 이성에 대해 On Grief and Reason〉(1995)를 꼽을 수 있다. 이탈리아의 도시 베네치아와 자신의 인연을 조용하면서도 치밀한 문체로 다룬 산문인 〈Fondamenta degli Incurabili〉(1991)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수작 가운데 하나이다.
2. 솔제니친 <Aleksandr (Isayevich) Solzhenitsyn>
1918. 12. 11 러시아 키슬로보트스크~ .
소련의 소설가, 역사학자.
20세기 후반의 가장 중요한 러시아 문예가로 1970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카자크 혈통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사고로 죽었으므로 주로 어머니 손에서 자라났다. 로스토프나도누에서 대학교를 다녀 수학과를 졸업했으며 모스크바대학교 문학과 통신과정을 밟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여 포병대 대령으로 진급했으나 1945년 스탈린을 비판한 편지를 썼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8년간을 감옥과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보낸 뒤, 3년간 더 강제 추방당했다. 1956년 복권되어 러시아 중부에 있는 랴잔에 정착허가를 받아 그곳에서 수학교사로 있으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60년대초 탈(脫)스탈린화 정책의 뚜렷한 증거로서 문화생활에 관한 정부의 통제 완화에 힘을 얻은 그는 자신의 단편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Odin den iz zhizni Ivana Denisovicha〉(1962)를 대표적인 소련 문학지 〈노비 미르 Novy Mir〉에 보냈다. 이 소설은 이 잡지에 실려 곧 인기를 얻었으며, 유명인사가 되었다. 솔제니친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스탈린 시대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한 수인이 겪는, 틀에 박힌 일상 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직접 겪은 수용소 생활의 일상사인 싸움과 물질적 궁핍을 다룬 이 책은 간결하고 진솔한 언어와 뚜렷한 근거를 통해 대중들의 감동을 불러 일으켰고, 스탈린 이후 세대에 수용소 생활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최초의 소련 문학작품이기에 감동은 더욱 증폭되었다. 이 책은 소련 내부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정치적으로 큰 화제를 모았으며 소련의 많은 작가들에게 스탈린 체제 때 겪었던 수감생활에 관한 보고서를 쓸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러나 그는 머지 않아 당국의 눈 밖에 났다. 1964년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실각한 뒤 소련은 문화활동에 대한 이념적 제재의 끈을 조이기 시작해 솔제니친은 처음으로 많은 비난에 부딪혔고, 이어서 정부의 탄압정책에 열렬히 항거하는 인물로 떠오르게 됨에 따라 공공연히 시달림을 받았다. 1963년 단편소설집을 출간한 뒤로는 공식적인 작품 출판을 금지당했으며 따라서 자신의 작품을 해외에서 펴내거나 사미즈다트('자비 출판') 문학 형태, 즉 은밀히 나도는 비합법적 문학 형태를 빌려 발표해야 했다. 이후 몇 년은 여러 편의 야심작을 외국에서 출판함으로써 솔제니친의 국제적 명성이 확립된 시기였다. 첫번째 장편소설이라 할 수 있는 〈제1원 V kruge pervom〉(1968)은 수학자로서 감옥의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보냈던 시절을 간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책은 비밀경찰을 위해 연구활동을 하는 과학자들이 당국에 협력하여 감옥의 연구소에 남아 있을 것인가, 아니면 협력을 거부하여 노동수용소의 짐승 같은 상황 속으로 되돌아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순간에 이르렀을 때 보여주는 다양한 반응을 추적하고 있다. 1968년 발표된 〈암병동 Rakovy korpus〉은 솔제니친 자신이 1950년대말 카자흐스탄에 강제 추방당해 입원해 있으면서, 말기라고 진단받았던 암을 성공적으로 치료한 과정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주인공은 솔제니친 자신처럼 최근에 노동수용소에서 풀려나온 사람이었다.
솔제니친은 1970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나 소련 정부가 그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을까봐 두려워 스톡홀름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 다음 나온 장편소설은 제1차 세계대전 초기에 독일군이 러시아군을 박살내고 승리를 거둔 탄넨부르크 전투를 묘사한 역사소설 〈1914년 8월 Avgust 1914〉(1971)이다. 해외에서 출판된 이 소설은 러시아 장군 A.`V.`삼소노프 휘하의 불운한 제1군 소속의 몇몇 사람들을 중심으로 차르 체제의 약점을 간접적으로 탐사하여 마침내 1917년 혁명으로 차르 체제가 무너지는 과정을 그렸다. 1973년 12월에는 파리에서 〈수용소 군도 Arkhipelag Gulag〉 제1부가 출판되었다. 소련에서 KGB가 이 소설의 필사본 1부를 압수한 뒤였다. 1974~78년에는 전 3권에 이르는 이 소설 전체가 영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수용소 군도〉는 볼셰비키가 러시아에서 정권을 잡은 1917년 직후 생겨나 스탈린 시기(1924~ 53)에 엄청난 규모로 늘어난 감옥과 노동수용소의 방대한 체계를 문학적$역사적으로 기록하려는 그의 노력의 결과였다. 이 작품에는 소비에트 당국이 독특한 방식으로 40년간 행해왔던 체포$심문$정죄(定罪)$이송$구금이 여러 군데에 걸쳐 묘사되어 있으며, 역사적 해설과 솔제니친 자신의 진술이 수용소 시절에 사귀어 선명한 기억으로 간직한 여러 수인들의 방대한 개인적 증언들과 뒤섞여 있다. 그가 이 작품을 쓴 의도는 소련 당국이 수용소의 역사를 틀에 박힌 형식으로 쓰도록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리라 확신했으므로 그러한 형식의 역사서술을 대신하는 하나의 문학적 대안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었다.
〈수용소 군도〉의 제1권이 출판되자마자 그는 소련 언론의 공격을 받았다. 서유럽에서는 그의 운명에 큰 관심을 보였으나 그는 체포당해 1974년 2월 12일에 반역죄로 법정에 섰다. 이튿날 소련에서 추방당했고 나중에 스위스로 갔다. 12월에는 그때까지 받지 못했던 노벨상을 넘겨받았다. 이듬해에는 기록소설인 〈취리히에서의 레닌:여러 장들 Lenin v Tsyurikhe:glavy〉(1976)을 펴냈다. 이어서 미국을 여행하다 버몬트의 한적한 시골에 정착했다. 1980년에는 2권의 논픽션을 출판했는데, 〈졸참나무와 송아지 The Oak and the Calf〉에서는 소련에서의 문학적 삶을 묘사했으며 짤막한 〈치명적인 위험 The Mortal Danger〉에서는 미국이 러시아를 잘못 이해함으로써 생기는 위험을 본 그대로 분석했다. 그는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서유럽식 제도가 아니라 러시아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원천으로 하는 박애적$권위주의적인 체제 수립을 제시했다.
3. 부닌 (Ivan Alekseyevich Bunin)
1870. 10. 22(구력 10. 10) 러시아 보로네슈~1953. 11. 8 파리.
러시아의 시인, 소설가.
러시아에서 처음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1933) 러시아 최고의 명문장가로 꼽힌다. 언론인이자 사무원으로 활동하면서 시를 쓰거나 번역했고 1891년 첫번째 시집을 출간했다. 롱펠로의 〈히아와타 Hiawatha〉를 번역해 1903년 러시아 아카데미로부터 푸슈킨 상을 받았고 1909년 아카데미 명예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바이런의 〈맨프레드 Manfred〉$〈캐인 Cain〉을 번역했다. 푸슈킨 계열의 전통에 속하는 고답풍의 시를 썼으며 전위적인 모더니즘 경향을 거부했다. 주로 단편소설 작가로 명성을 떨쳤는데 그중 한 단편집의 제목으로 삼았던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 Gospodin iz San-Frantsisko〉(1916)는 걸작으로 손꼽힌다. 1943년에 마지막 단편집 〈어두운 거리 Tyomnye alley〉가 출판되었다. 장편소설로는 〈마을 Derevnya〉(1910)$〈미탸의 사랑 Mitina lyubov〉(1925), 자전적 소설인 〈아르세니예프의 생애 Zhizn Arsenyeva〉(1930), 그 속편인 〈리카 Lika〉(1939), 2권의 회고록 〈저주받은 날들 Okayannye dni〉(1926)$〈회상 Vospominaniya〉(1950) 등이 있다. 개인적으로 알고 지냈던 톨스토이와 체호프에 관해서도 각각 〈톨스토이의 해방 Osvobozhdeniye Tolstogo〉(1937)과 미완성인 〈체호프에 관하여 O Chekhove〉를 썼다. 〈체호프에 관하여〉는 그가 죽은 뒤 1955년 출판되었다.
'소련 국민의 역사적 전환기를 묘사한 예술적 기량과 정직함'으로 196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혁명 이후 계속된 내전 때문에 중등학교 4학년까지밖에 공부하지 못했으나 돈에 소비에트 정권이 생긴 뒤 문화운동에 종사했고, 1924년 단편 〈검은 사마귀점〉으로 등단했다. 그후 2년간 〈목동〉(1925)$〈망아지〉(1926) 등 24편의 단편과 중편 〈길〉(1926)을 썼다. 이들 작품을 담은 2권의 단편집 〈돈 지방 이야기 Donskie rasskazy〉(1925)$〈남보랏빛 광야〉(1926)를 통해 작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이 단편에서 그는 같은 동포들끼리 적과 동지로 나뉘어 서로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혁명의 냉엄한 현실을 묘사했다. 이후 그는 혁명의 역사와 카자크라는 특수한 계층의 운명을 다룬 작품 〈고요한 돈 강 Tikhy Don〉(1928~40)을 썼다. 혁명의 와중에서 자기의 살아갈 길을 찾지 못한 채 백군과 적군 사이에서 헤매다가 마침내 파멸하는 성실한 카자크 청년 그레고리 멜레호프와 정열적인 아내 악시냐와의 비극적 연애를 중심으로 제1차 세계대전, 혁명, 내전으로 이어지는 동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운명을 묘사했다. 이 소설은 민족적 대서사시이며, 혁명 이후 러시아 문학의 최고걸작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으로 숄로호프는 세계적인 작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2번째 장편 〈개척되는 처녀지 Podnyataya tselina〉(1부 1932, 2부 1960)는 1930년대 집단화운동과 이에 직면한 농민들의 고뇌, 백군 잔당과 부농의 음모를 묘사한 작품으로, 제1부를 발표하고 제2부를 완결하는 데 거의 30년이나 걸렸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종군작가로서 전선에 나가 나치의 잔학상을 폭로하는 르포르타주와 단편 〈증오의 가르침〉(1942)을 썼으며, 장편 〈그들은 조국을 위해 싸웠다 Oni Srazhalis za rodinu〉(1943~44)에서는 소련군의 반격과 승리의 양상을 그리고자 했으나 미완성인 채로 끝났다. 전후에는 포로가 되어 독일 수용소에 있는 한 병사의 운명을 그린 단편 〈인간의 운명 Sudba cheloveka〉(1956)을 썼고, 몇몇 정치평론과 〈개척되는 처녀지〉 제2부를 완결하는 외에 거의 작품을 쓰지 않았으며 고향인 뵤셴스카야에서 사냥을 즐기며 소박한 전원생활을 보냈다. 제2회 작가대회(1954)에서는 모스크바와 별장만을 오가며 실생활을 외면하는 작가들을 비난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932년 당원, 1937년부터 최고회의의 대의원이 되었고 1961년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말년에는 곧잘 당과 정부 정책을 변호하는 발언을 했으므로 해빙 이후에는 그를 혐오하는 청년도 많았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문단에 등단하고 스탈린 시대를 살아낸 숄로호프로서는 일관된 태도였다.
1940년 스탈린상, 1960년 레닌 문학상, 196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고요한 돈 강>,〈개척되는 처녀지〉는 이미 소련 문학의 고전적인 명작으로 꼽히며 소련의 60개 이상의 민족어는 물론 세계 20여 개국어로 번역되었고 〈고요한 돈 강〉은 120쇄 이상 중판했다.
숄로호프 문학의 일관된 큰 주제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표류하는 개인의 운명이었다. 혁명$국내전$집단화운동이라는 역사적 대사건을 사실에 기초하여 거시적 각도에서 묘사하는 한편, 그중에서 개인의 운명과 생활을 자연주의적이라고 할 만큼 미세하게 묘출하는 수법은 〈전쟁과 평화〉 등 톨스토이가 쓴 사실주의의 강한 영향을 찾을 수 있으며, 방언을 많이 사용해 지방색이 풍부한 문장은 고골리의 영향으로 지적된다. 이런 의미에서 숄로호프는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과 소련 사회주의 초기에 현저하게 발전하던 활기를 강하게 결속시켜 20세기의 새로운 문학을 탄생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대표작 〈고요한 돈 강〉에서 그가 제기한, 혁명에 있어서 진정한 도덕이란 무엇이며, 무엇이 악인가 하는 문제는 극히 현실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단순한 역사소설$대하소설의 범주를 넘는 호소력이 강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과 조레스 메드베데프를 비롯한 망명작가들은 〈고요한 돈 강〉의 대부분이 1920년에 죽은 카자크의 작가 표도르 크류코프의 글을 표절한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이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책의 제1권이 발표되었을 무렵 숄로호프는 아직 젊고 경험이 부족했으며 이에 견줄 만한 문학성을 가진 또다른 작품을 내놓지 못했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1979년에 그의 〈선집〉이 출판되었다.
5. 파스테르나크 <Boris (Leonidovich) Pasternak>
1890. 2. 10(구력 1. 29) 모스크바~1960. 5. 30 모스크바 근처 페레델키노.
러시아의 시인.
장편소설 〈의사 지바고 Doctor Zhivago〉로 1958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소련 내에서 커다란 반대가 야기되어 수상을 거부했다. 러시아 혁명의 잔혹함과 그 여파 속에서 펼쳐지는 방황, 정신적 고독, 사랑을 서사적으로 기술한 이 소설은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나 소련에서는 비밀리에 번역본으로만 유포되었다.
그는 교양 있는 유대인 가정에서 성장했다. 아버지 레오니드는 미술교수였으며 소설가 레프 톨스토이,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이들은 모두 이 집안을 자주 찾은 손님이었음), 그리고 레닌의 초상화를 그렸다. 어머니는 피아니스트 로자 카우프만이었다. 어린시절 파스테르나크는 조숙한 시인이었으나 음악가가 될 작정이었다. 6년간 음악이론과 작곡을 공부했으나 갑자기 철학으로 방향을 바꾸어 모스크바대학교와 독일 마르부르크대학교에서 철학 강좌를 수강했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신체상의 이유로 병역이 면제되는 대신 우랄 지방의 화학공장에서 근무했고 혁명 후에는 소비에트 교육부 도서관에서 일했다.
첫번째 시집은 1913년에 출간되었다. 1917년에는 놀랄 만한 2번째 시집인 〈장벽을 넘어서 Poverkh baryerov〉를 펴냈으며, 〈누이, 나의 삶 Sestra moya zhizn〉(1922)을 출간하면서 역량 있는 신인 서정시인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시는 상징주의의 영향을 반영한다. 러시아의 기준으로 볼 때는 비록 전위적이고 비교적(敎的)이었으나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933~43년의 작품은 공식적인 작품양식(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너무 동떨어져 출판이 불가능했으며 1930년대말의 대숙청 기간에 그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전전긍긍해야 했다. 그가 스탈린의 고향 그루지야 시인들의 작품을 번역했기 때문에 숙청에서 제외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셰익스피어, 괴테,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들, 베를렌, 릴케 등을 번역하면서 간신히 생계를 유지했다. 1956년 파스테르나크는 큰 기대에 부풀어 모스크바의 유력한 월간지에 소설 〈의사 지바고〉를 기고했으나 "10월혁명과 혁명의 주역인 인민, 소련의 사회건설을 중상했다"는 비방과 함께 거부당했다. 1957년 이 소설은 이탈리아의 출판사를 통해 서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파스테르나크에게서 저작권을 사들인 그 출판사는 '수정을 위해' 원고를 되돌려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 영역본이 출간된 1958년에는 이미 18개 국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노벨상 수상 소식이 알려지자 소련에서는 파스테르나크 탄핵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작가동맹에서 제명되었으며 생계유지의 수단마저 빼앗겼다. 공공 모임에서는 그를 국외로 추방하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는 제1서기장 흐루시초프에게 "조국을 떠난다는 것은 내게 죽음을 의미한다"라는 취지의 탄원서를 써보냈다. 그는 페레델키노의 집에서 암과 심장병에 시달리며 여생을 보냈다. 영어로 번역된 작품으로는 단편소설과 자전적 작품 〈안전 통행권 Okhrannaya gramota〉(1931), 그리고 엄숙함과 고요한 내적 관조로 끝나는 그의 시작품 전체가 있다. 1987년에야 소비에트 작가동맹에서 파스테르나크의 사후 복권을 허락함으로써, 1958년 작가동맹에서 추방된 이후 불법으로 되어 있던 작품들의 적법성이 인정되었고, 드디어 〈의사 지바고〉가 소련 내에서 출판될 수 있었다. 시인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가 주도한 평가위원회는 복권에 덧붙여 페레델키노에 있는 그의 집에 기념관을 세울 것을 건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