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하고 훌륭한 러시아 음악은 많은 위대한 작곡가들; 글린까, 다르가믜스끼, 보글딘, 무소르스끼, 림스키꼬르사꼬프, 차이꼽스끼, 스끄랴빈, 라흐마니노프, 그라주노프 등등에 의해 발전되었다. 이들의 작품은 러시아를 찬미하며, 온세계의 여러나라에서 이들의 음악이 연주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밝게, 선하게 깨끗하게 한다.
19세기 러시아에서 음악문화가 꽃피웠던 것은 러시아 음악 발전을 모든 준비 과정이었다. 여러 세기를 걸쳐 사람들에게 고귀한 민족음악 예술이 모아졌다. 서민적, 서정적 그리고 음악적 작품은 태고속에 존재하며, 서민들의 모든 삶과 역사를 통하여 재현된다. 그들의 풍속, 관례, 자유를 위한 그들의 노력과 투쟁, 그리고 더 나은 삶에 희망과 소원, 적지 않은 서민들 속에서 스떼파나 리지나, 에멜리안 뿌가쵸바 그리고 다른 농민 봉기 운동의 주동자에 관한 거칠고 씩씩한 노래가 창작되었다.위대한 러시아인 뿌쉬낀은 라지나와 뿌가쵸바에 관한 노래를 높이 평가했다. 그의 소설 "대위의 딸"에서 뿌쉬낀은 뿌가쵸바의 아끼는 노래라고 전해지는 "잠잠하라 그대여, 푸른 참 소나무 숲의 어머니"를 인용했다. 러시아 클래식 작곡가들은 민족음악을 조심스럽게 모으고 배웠다. 그들 중 몇몇은 -발라끼레프, 림스끼꼬르샤꼬프, 랴도프- 피아노 반주의 성악곡인 러시아 노래 소품집을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품에 종종 러시아 선율을 사용했다. 창작된 그들의 멜로디는 러시아 노래의 억양, 가락, 선율의 다른면을 제공했다. 글린까와 차이꼽스끼, 보로딘과 무소르그스끼의 음악은 많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쉽게 접근되고 이해된다. 왜냐하면 그 음악은 아름다운 선율과 민요와 비슷한 선율을 갖고 있다.
다음내용은 "러시아 음악문학" E. 스미르노바(저)에서 번역 하였습니다
18세기에 세태풍자의 "거리의 노래"가 화음과 화성의 동반과 함께, 새로운 자신의 성격 표현에 따라서 등장했다. 더욱 단순한 성격에 의한 거리의 노래는 "촌스럽다"고 자주 불리우는 오랜 서민 노래에서 선율적 근본이 생겨났다. 또한 각 거리의 노래에서 옛 노래의 화성적 특징이나 박자적 특징이 비슷한 분량으로 가락에 사용된다.
러시아 시인들의 작품은 거리의 노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노래 "무엇 때문에 내가 너에게 화를 내었나?"는 18세기 유명한 러시아 시인 수마로꼬바의 약간 수정된 가사로 서민 가수에 의해 만들어졌다.
18세기에 러시아 서민 노래의 "기록된 악보"가 나타났다. 궁중 성악가 - 구슬리 연주자 뜨루똡스끼가 첫 서민노래 모음집을 출판했다; 작곡가이고 피아니스트인 쁘라치와 친분 있는 유명한 러시아 시민 리보빌로가 광범위한 구성의 모음집을 뒤따라 출판했다. 이 모음집에는 대중적이고 사랑 받는 서민 옛 노래에 그치지 않고 더욱 새로운 도시의 노래가 있다. 모음집에서 음악 애호가들은 아름다운 러시아 선율과 만날 수 있다. 나중에 작곡가들이 오페라, 악기를 위한 작품에서 그 노래의 상당수를 사용한다.
18세기 기간에는 익숙한 가락의 서민 노래는 다양한 악기의 소품에, 오페라, 극장 연극 음악에 자주 연주되었다. 물론, 서민의 선율에 대한 관심이 금방 생긴 것은 아니다. 오랜 기간동안 러시아인들과 도시사람들은 외국 작곡가들의 작품에 만족해하고 있었다. 뻬쩨르부르그 궁전이 있는 곳에서는 한정된 청중을 위한 화려한 오페라 극이 자주 공연되었다. 30년대 초반 빈번하게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를 방문했던 소규모의 오페라 배우 일행의 활동은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갖는다. 적절한 가격은 모든 사람들이 극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주었다. 통속적인 극들의 적절한 가치를 가능케 했다. 이것은 세태 풍자 성격의 소재로 쓰여진 이태리, 프랑스의 명랑한 코메디 오페라이다. 오페라 노래에는 빈번히 대화와 담화가 교체한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대화형식의 오페라에서 최초의 러시아 오페라가 창작된다. 처음에 이것을 러시아 노래 선율에 근거한 음악들이 삽입된 단순한 세태 풍속 코메디였다. 이들 중 몇몇은 시대, 관습, 다양한 사회계층 - 상인, 관리들을 조소했다 (음악 농노 마틴스끼의 "상 뻬쩨르부르그의 가게"). 두말할 필요없이, 최초의 러시아 오페라와 진보적인 러시아 문학과의 관계가 나타났다 (특히 폰비지나 작품에서).
이 시대에 뻬쩨르부르그에는 모든 사람이 갈 수 있는 "러시아 극장"이 대단한 유명세를 가졌다.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 무대에는 예를 들어 산두노바 같은 재능 있는 러시아 예술가들이 공연했다. 쉐레메쩨보의 개인 극장에서의 자랑은 훌륭한 예술 농노 빠라샤 젬추고바였다 (서민들 속에서 그녀의 예외적인 운명에 대한 노래 "늦은 저녁 숲 속에서"를 만들었다). 그러나 러시아 농노의 계약 조건은 재능 있는 러시아 배우들과 음악가들이 빈번히 요절하는 비참한 숙명을 만들었다.
음악가들이 법적 권리가 없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8세기 말 러시아에는 이미 자신의 작곡가 학교가 세워졌다. 젊은 작곡가들은 표현력 풍부한 가곡과 완성된 러시아 노래,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품, 소관현악 곡, 극음악 그리고 마침내 오페라. 이들 중에는 두뱐스끼. 베레좁스끼, 보르뜨냔스끼, 포민, 한로쉬낀등이 있었다.
E.I. 포민 - 첫 러시아 오페라 작가중 하나. 엡브스티그네이 일빠찌에비치 포민은 1761년 뻬쩨르부르그 포병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모들은 6살에 그를 예술 아카데미 음악교실에 입학시켰다. 성공적인 아카데미 졸업 후에 포민은 한층 더 연마를 위해 이태리로 파견된다. 볼로냐에서 그는 유명한 작곡가 이론가인 마틴 신부에게 사사한다. 포민의 성공은 높이 평가되었다.
마치 초기 어린 모차르트처럼, 볼로냐 교향(악) 아카데미 회원으로까지 선출되는 대단한 영예를 받았다. 이태리에서 3년을 보내고 포민은 러시아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그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오페라 희극에 사용되는 음악을 썼다. 1787년 그의 오페라 "말 탄 마부"(혹은 "우연한 오락회")의 첫 공연이 있었다. 이 오페라의 훌륭한 노래와 합창에는 마부의 고통과 기쁨의 삶이 재현되었다. 오페라의 훌륭한 장면 중에 -합창 "높이 나는 매"; 같은 제목의 느린 민요곡을 합창곡으로 묘사했다. 환상적인 피날레의 오페라 합창 "들판에 자작나무가 서 있다"는 대단히 기지가 풍부한 마무리이다. 기본 오페라 서곡에는 조소적이며 대담한 노래 "대위의 딸이여, 한밤중에 숲 속에서 산책하지 마라"가 있다. 포민은 러시아적 소재에 관심을 갖고, 오페라 "노보고라드의 영웅 보에슬비치" 같이 그 밖의 다른 오페라에 사용했다.
이때에 커다란 유명세를 누린 것은 아블레시모브의 코메디 - "제분소 주인 - 마법사, 사기꾼 그리고 중매인"이다. 이 극의 음악을 가장 처음에 만든 것은 소꼴롭스끼이다 : 그는 대중적인 러시아 노래에서 가락을 선별하고 오케스트라 반주의 노래를 위해 변곡 했다. 18세기 말에 소품 음악은 활발하게 창작되었고, 그리고 코메디는 현실적인 희극 오페라로 바뀌었다. 이는 포민의 남다른 노력의 결과로 생각된다. 오페라에는 훌륭한 앙상블 기법이 나타난다. 이러한 형태로 서곡에서 소나타 형식이 전개되었다.
오페라 "제분소 주인 - 마법사"에서는 적지 않게 밝고 표현력 풍부한 솔로 장면이 있다. 예를 들어, 필리모나의 노래 "이런 노래를 부른다", 아뉴타의 아리아 "만일 내가 젊고 당당했다면".
포민의 가장 뛰어난 작품 - 고대 그리스 신화 소재의 멜로드라마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1792), 비운의 러시아 극작가 끄냐쥬닌의 재능적인 완성. 포민의 음악, 완벽한 연극성(극적 긴장감) - 18세기 러시아 오케스트라 음악의 훌륭한 표본이다.
포민 작품의 성공이 그에게 재정적인 생활 보장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작곡가는 그의 생계를 위해 수업과 반주자로 일했다. 너무 일찍 다가온 죽음은 1800년 39세의 나이로 그를 데려 갔다.
보르뜨냔스끼 - 18세기 재능있는 다른 작곡가. 그의 작품의 근본 영역은 합창 음악이다. 드미뜨리 스테빠노비치 보르뜨냔스끼는 1751년 우크라이나 글루호바에서 태어났다. 또한 1739년 이 도시에 러시아 궁정 성악가 배출을 위해 성악 학교가 문을 열었다. 7살의 보르뜨냔스끼는 뻬쩨르부르그에 있는 성악 합창단에 맡겨졌다. 아름다운 목소리와 뛰어난 음악적 소질의 어린 보르뜨냔스끼는 궁정 뜰에서 열리는 오페라 극에 출연했다.
1769년 그는 이태리로 가서 10년 정도를 지냈다. 러시아로의 귀국과 동시에 보르뜨냔스끼는 궁정 합창 지도자로 임명되었고, 1796년 쁘리드보르늬(궁정) 합창단 책임자가 되었다. 이 때에 그는 남달리 합창음악에 정열을 바쳤다. 보르뜨냔스끼는 교회 합창에 많은 에너지를 쏟았고, 모든 힘을 다해 러시아 성악가 배출을 위한 개선에 힘썼다. 보르뜨냔스끼는 교회 합창에 30년 넘게 종사했다. 그는 1825년 뻬쩨르부르그에서 죽었다.
보르뜨냔스끼는 합창을 위해 장대한 작품인 오페라를 썼다. 그 외에 악기 음악: 소 관현악곡, 피아노 소나타와 소품, 실내악 작품. 그의 피아노 소나타는 지금까지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 작품들은 형식에 있어 완전하고 체계적이며, 음악은 표현력 풍부한 선율, 평안함, 침착한 기분, 유연한 발전의 특색을 가진다. 다른 러시아 음악가들에 관한 자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농노 출신의 재능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 이반 엡스타피에비치, 한도쉬낀 (1747 -1804).
한도쉬낀 - 매혹적인 바이올린, 기타 연주자, 러시아의 여러 도시와 외국에서 많은 연주를 했고, 그 시대의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들과 대등하게 겨루었다. 한도쉬낀은 무반주의 러시아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했다. 그의 하나 혹은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피아노를 위한 (예를 들면, 노래 "나는 강으로 간다"의 테마처럼) 러시아 노노 테마의 변주곡은 신선함을 잃지 않았다.
보르뜨냔스끼와 한도쉬낀의 실내악, 오케스트라 소품들, 포민의 오페라 서곡들과 다른 작곡가들에 의해 19세기 러시아 악기 음악이 개화 준비되었다.
노래와 가곡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에 음악예술에서 가장 사랑 받는 형태는 가곡이었다. 그 시대의 많은 가곡들은 도시의 세대풍자 노래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구성상에 있어 가곡들은 서민노래와 별 차이가 없다. 드물지 않게 구절형식을 유지한다. 이 "노래의 가곡들"은 피아노, 하프 혹은 기타, 발랄라이까 반주로 연주했다. 서민의 노래처럼 가곡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 기분, 체험을 반영한다. 그들 중 뛰어난 곡은 서민 노래에서 구전되고 자연스럽게 변주되며, 계속해서 바뀌었다. 예를들어 두빈스끼의 '신음하는 회색 비둘기'와 바를라모브의 "붉은 사라판"이 있었다.
18세기 초반 러시아 가곡 발전에는 작곡가 알랴비에브, 바를라모브, 구릴료브, 베르스똡스끼, 불라호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클래식 작곡가 작품에서 가곡과 실내 성악곡 장르의 두드러진 활약은 - 글린카와 다르가믜스끼이다.
A.A. 알랴비에브 (1787 - 1851)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알랴비에브는 1787년 따볼스크에서 태어났다. 많은 시골 아이들처럼 그는 학교에 가지 아니하고 집에서 교육을 받았고, 나중에 모스크바 대학에 갔다. 그는 광산청에서 일했다.
1812년 조국 전쟁시 알랴비에브는 러시아 군인으로 지원하여 빠리까지 갔었다. 전투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었고 전쟁공로 훈장을 수여 받았었다. 종전 후에 뻬쩨르부르그로 돌아와서, 그는 진보적인 러시아 인텔리 일원들과 가까워 졌다. 그의 친구들 중에는 - 그리바에도프, 오도엡스끼, 미래 12월 혁명자 - 무하노프, 베스뚜젭브 - 마르릴린스끼. 12월 혁명자들의 사상은 작곡가의 시각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뻬쩨르부르그에서 알랴비에브는 음악 작곡하는 것을 진지하게 공부했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극장, 오페라, 가곡 음악 작곡자가 되었고, 명성을 얻었다. 4중주와 3중주를 썼다. A. 델리비그 작사의 "꾀꼬리" 노래는 20년대 중반 폭넓은 유명세를 얻었다. 그 노래는 지금까지 소규모 음악에 연주되며, 오랜 사랑을 향유하고 있다.
알랴비에브의 인생에는 확실한 전환이 있었다. 1825년 그는 카드게임 하다가 살인자로 불공평한 유죄 판결을 받고 체포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3년을 보냈다. 마침내 모든 귀족 권리 박탈과 시베리아 유형의 판결을 받았다. 아마도 12월 혁명자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권력 지향적인 사람에서 벗어났다.
힘든 체험은 알랴비에브를 쓰러뜨리지 못했다. 시베리아에서 그는 많은 일을 했다. 군악대를 편성하고 가곡과 노래를 지었다. (그 중에는 자전적인 가곡 "이르띄쉬"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오케스트라, 실내악 작품을 작곡했다.
몇 년을 보내고 알랴비에브는 치료 차 까프까즈로 떠날 수 있었다. 까프까즈에서 머무는 기간동안은 작곡가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두 곡의 까프까즈 서민 노래를 듣고 기록했고 후기 작품에 까프까즈를 테마로 ("그루지아의 노래" "까바르다의 노래", 오페라 "암마라트씨", 뿌쉬낀의 시를 소재로 한 멜로드라마 "까프까즈의 포로") 창작했다. 또한 그때 알랴비에브는 우크라이나 서민 노래 모음 작업을 했다. 그리고 후에 그가 정착하여 살았던 오렌부르그에서 알랴비에브는 서민 노래를 배우고 모으는 일을 계속했다 - 이때에는 바쉬끼르 민족의 것을 했다.
후반기에 알랴비에브는 불법적으로 모스크바에서 살았다. 알랴비에브는 혁명시인 오가료브 작품을 접하게 되고, 그의 시에 몇 곡의 훌륭한 노래를 작곡한다: "목로주점" "농가", "나무지기". 이것에 러시아 민중의 힘든 부분을 반영했다. 알랴비에브는 1851년 모스크바에서 숨졌다.
"꾀꼬리" - 알랴비에브의 널리 알려진 노래 중에 가장 사랑 받는 곡 중의 하나이다. 간결하고 소박하다. 노래에 기타 반주 분위기의 생기 있는 피아노 전주가 선행한다. 성악파트 첫 음정에서 매혹적인 부드러움, 사색적인 선율이 발전한다. 광대하고 유연한 곡선은 금방 마음을 사로잡고, 엄격한 아름다움은 듣는 이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보통 러시아 서민노래들은 단조에서 나란한 장조로 (라단조 - 바장조) 조바꿈을 하고, 그것은 더 밝은 뉘앙스로 들려진다. 생각 있게 짜여진 후렴은 대비되어 들리며, 간결한 악기의 전주 음악이다.
이 노래의 훌륭한 연주자로는 트릴과 그 외의 기교로 노래를 장식한, 위대한 러시아 성악가 네쥐다노브, 후에 바르소브, 빤또펠-네체쯔끼가 있다.
A.E. 바를라모브 (1801 - 1848)
알렉산드르 에고로비치 바를라모브는 1801년 모스크바 퇴역 육군 중위인 하급 관리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소년은 청감으로 바이올린과 기타를 연주했다. 10살 때 그는 뻬쩨르부르그에 있는 궁정 성악 합창단에 맡겨졌다. 훌륭한 목소리와 뛰어난 감각의 소년은 합창단 책임자 - 보르뜨냔스끼의 관심을 끌었다. 보르뜨냔스끼는 어린 성악가와 따로 공부했다. 그 후 바를라모브는 자신의 선생님을 회상하며 감사했다. 교회 합창단에서의 공부가 끝나고, 바를라모브는 헤이그(네덜란드)의 러시아 대사관 소속 교회의 성악 선생님이 되었다. 그러나 곧 본국으로 돌아왔다. 1829년부터 그는 뻬쩨르부르그에서 살았다. 글린카와 친분을 갖고, 그의 집에서 음악 만찬회를 열곤 했다. 머지않아 모스크바 황제 극장의 교회합창 전문가를 돕는 업무를 맡았다. 그는 드물지 않게 성악- 연주가로 공연했다.
30년대에 바를라모브의 가곡과 노래들은 계속해서 폭넓은 유명세를 얻었다. 그것들의 내용은 다양했다. 그것들 중에는 서민들과의 거리가 가까운 ("아, 시간 시간이여"), 깊이 생각하며 집중하는 ("산꼭대기", "고통스럽다, 강하게 되지 못했다"), 힘차고 대담한("거리를 따라서 눈보라가", "약탈자의 노래", "볼가강을 거슬러 올라가")등의 광범위하고 풍요한 노래가 있다.
바를라모브의 노래는 진실하고 소박하여 19세기 30년대 러시아 서민들이 살아갔던 모습을 솔직하게 반영한다: 현실에 대한 불만족,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소망과 투쟁에 대한 갈망. 가곡 "강이 운다"와 "고독한 하얀 돛"은 그러한 노래들이다.
가곡 "고독한 하얀 돛"은 레르만또프가 가사를 썼다. 음악에서 작곡가는 시의 정서를 적절하게 전달한다 - 공격적 돌진, 행복에 대한 목마름, 그것을 위한 싸움의 준비. 가곡에는 열정적 리듬의 볼레로 - 스페인 춤이 동반되는 것으로 써 있다.
바를라모브는 약 200곡의 가곡과 노래를 작곡했고, 연주회용 러시아 서민 노래의 완성과, 노래를 위해 "학파"를 썼다.
A.L.구릴료브 (1803 - 1858)
알렉산드르 리바비치 구릴료브는 1803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를로브 백작의 음악 농노였으며, 농노 오케스트라의 책임자였다. 구릴료브의 첫 교사는 아버지였다. 소년은 어려서부터 농노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그는 오를로브 백작의 아이들과 같이 러시아에 오래 살고있는 훌륭한 아일랜드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존 필드에게 피아노 수업을 받았다. 그는 그리고 작곡가 게니쉬타에게 사사했다.
굴욕적인 농노의 상황과 혹독한 소년시절은 구릴료브 성격에 영향을 끼쳤다. 1831년에서야 그와 그의 아버지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젊은 음악가는 많은 곡을 작곡하고, 수업을 하고, 음악회에서 연주했다. 구릴료브에게는 바를라모브와의 우정이 많은 의미를 주었다: 바를라모브의 따뜻한 관심은 그의 고독한 삶에서 많은 것을 해소해 주었다. 바를라모브의 노래 "너는 이른 아침에 그녀를 깨우지 마라"의 멜로디에서 구릴료브는 환상적인 피아노 변주곡을 작곡했다. 구릴료브의 삶은 평탄치 못했다. 그의 힘든 생활 환경은 1858년 그를 사망하게 한 고통스러운 정신병의 원인이 되었다.
구릴료브는 노래와 가곡의 작곡가로써 최대의 유명세를 누렸다. 구릴료브의 모든 작품 - "러시아 노래", 서민 노래의 완성이나 피아노 소품 - 은 정겹고, 솔직하고, 따뜻함으로 구별된다. 특별히 사랑과 인기를 받은 노래는 "사랑하는 어머니", "회색 제비가 난다" "이별", "방울".
구릴료브의 많은 가곡과 노래는 춤곡 리듬을 기본으로 한다. - 마주르카, 폴카, 왈츠. 노래 "작은 집"의 멜로디는 열정적인 왈츠 연주의 성격으로 쓰여졌다. 반대로 노래 "방울"과 "회색 제비가 난다"의 멜로디는 특유한 정성이 있는 억양과 유연한 리듬의 슬프고 환상적인 왈츠이다.
노래 "방울"은 대중적이 되었다. 그것은 매혹적이며 솔직한 감정으로 듣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눈앞에 멀고 끝이 없는 길이 펼쳐지고, 슬프고 비탄에 찬 마부의 노래, 단조로운 방울 소리, 멜로디는 왈츠 리듬에서 발전한다. 그 곡은 유연하고 슬픈 작품의 시작에서 끝 부분의 극적인 절정으로 다다른다.
알랴비에브, 바를라모브 그리고 구릴료브의 작품은 귀중한 러시아 음악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지금까지 그들의 훌륭한 노래와 가곡들은 성악가들과 합창단의 연주목록에 사용되고, 대중들에게 사랑 받으며 불려진다.
이고르 브릴 (피아니스트, 작곡가)
유명한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 러시아 공훈 예술가, 그네신 국립 음악 대학 교수, 재즈과 학장. 그의 책 ソ퓽? 즉흥 재즈 피아노? (5판 발행)는 러시아 출판물 최초의 체계적인 재즈 교제롤 꼽힌다.
이고르 브릴은 미국, 인도네시아, 프랑스, 독일, 스위스, 동유럽과 아시아 등지에서 많은 연주회를 갖었다. 최근에는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연주했다-쌍둥이 형제 드미뜨리, 알렉산드르와 재능있는 젊은 연주자들과. 17개의 음반을 녹음했으며 그 중 4개의 음반은 자작곡으로 구성되었다. 2개의 음반은 미국에서 제작되었다.
출처: http://www.mmv.cityline.ru/person/bril.htm
블라지미르 이바노비치 페도세에프 (지휘)
러시아 민족 예술가. 차이꼽스끼 발쇼이 심포니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 예술 감독. 문화 아카데미의 영향력있는 회원.
1933년 8월 5일 레닌그라드 출생. 아버지-이반 이바노비치 (1891년 생). 어머니-엘레나 니꼴라에브나 (1891년 생). 아들-미하일 (1958년 2월 28일 생). 딸-이리나 (1963년 10월 23일 생).
전 그네신 음악 교육 인스띠뚜뜨를 마치고 (1957년) 차이꼽스끼 모스크바 국립 깐세르바또리에서 음악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1972년). 1974년부터 차이꼽스끼 발쇼이 심포니 오케스트라 예술 감독과 상임지휘자를 역임하며, 1977년부터는 '베니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역임. 러시아 민족 예술가, 글린카 국가상 수상자, '헌신적인 활동' 훈장 수상자.
림스끼-꼬르사꼬프의 오페라 タ읏昰? 봄? CD녹음으로 '황금하프'상 수상: 프랑스 국립 녹음 아카데미 (프랑스); '아사히' (일본) 티비방송국 은상 수상. 세계 20개 심포니 오케스트라 국제 녹음 콩쿨에서 2위 수상.
출처:www.mmv.cityline.ru/person/fedoseev.htm
블라지미르 레오니다비치 꾸드랴
벤 벨그라드 국제 지휘 콩쿨 입상, 모스크바 850주년 기념 행사 폐막 음악회 총담당자.
1954년 볼가그라드 출생.
1984년-전 그네신 음악교육 인스띠뚜뜨 (현 그네신 국립 음악 대학) 졸업 (가쉬르스끼 교수사사 플룻전공, 런던 국제 지휘 콩쿨 수상자 뽄낀사사 오케스트라 지휘전공).
1984-1986년-국립 발쇼이 심포니 오케스트라 (블라지미르 페도세에프) 연주자.
1986-1993년-모스크바 국립 아카데미 심포니 오케스트라 솔리스트.
세계 각국에서 연주활동: 일본, 미국, 스위스, 캐나다,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등. 발레리 게르기에브 드미뜨리 끼다엔까, 마리스 얀손스 등 여러 유명한 지휘자하에 활동.
1987년 10월 벨그라드에서 열린 12회 국제 음악가-연주가 콩쿨 수상.
1990년 강사로 시작하여 1996년부터 부교수로 러시아 국립 음악 대학에 재직 중.
1993-1995년- 러시아 심포니 오케스트라 ?CHYREN? 예술감독, 지휘자. 1993,1994년 일본에서의 해외공연에 ト껑? 폰드 라디오뼁【? 림스끼-꼬르사꼬프, 무소르그스끼, 보로딘의 작품을 녹음했다.
1995년 10월 비엔나에서 열린 국제 음악 콩쿨 입상 (심포니 지휘-1위).
1996년부터-울리야노바 국립 아카데미 심포니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 1997년 한국에서 공연.
활발한 연주활동을 펼침.
바로크에서 현대음악까지 다양한 오케스트라 스타일의 연주목록이 있다.
출처:http://www.mmv.cityline.ru/person/kudrya.htm
알렉산드르 루딘
예술감독겸 오케스크라 상임지휘자, 러시아 공훈예술가.
1983년 리바 에브그라포브 사사 첼로전공 그리고 유리 빠니좁낀 사사 피아노전공으로 그네신 국립 음악 대학 졸업. 1989년 드미뜨리 끼따엔꼬 사사 지휘전공으로 모스크바 깐세르바또리야 졸업.
'프라하 소협주곡' 콩쿨(1972), 라이프찌히에서 열린 바흐콩쿨(1975), 플로렌스에서 열린 가스빠라 까싸도콩쿨(1979), 모스크바에서 열린 차이콥스키콩쿨(1978,1982)에서 입상.
1988년부터 'MUSICA VIVA' 실내관현악단을 책임지면서 동시에 오스트리아 오케스트라 'ARPEGGIONE'에서 협력하고 있다.
영국 왕실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런던), 덴마크 라디오 오케스트라(코펜하겐), 비인 심포니 오케스트라, 바바리아 오케스트라, 차이꼽스키 발쇼이 심포니 오케스트라, 러시아 내쇼날 오케스트라에서 솔리스트로 지휘자로 활동한다.
실내악에서는 유리 바쉬메트, 알렉세이 류비모브, 벨라 다비도비치, 드미뜨리 시뜨꼬베쯔끼, 블라지미르 스삐바꼬브, 나탈리야 구뜨만, 블라지미르 크라이네브와 늘 같이 연주한다.
오랫동안 A.루딘과 돈독한 예술적 교류를 갖어온 많은 유명한 작곡가로는 : Д.까발렙스끼, Э.데니소브, И.체레쁘닌, В.실베스뜨로브, Р.쉐드린, В.아르떼모브, А.골로빈이 있다.
A. 루딘은 '멜로디야', '러시아 시즌', '러시아 디스크', RCD, 'Naxos', 'Olympia', 'Tudor' 등에서 솔리스트겸 지휘자로써 컴팩디스크를 녹음했다.
현재 차이콥스키 모스크바 국립 컨세르바또리야 부교수로 재직중이다.
1993년부터 자선예술단체인 '음악 클럽'의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출처: http://www.mmv.cityline.ru/p/o/musica_viva/rudin.htm
실내관현악단 '러시아 모임'
예술감독겸 지휘자 뱌체슬라브 뜨루쉰. 이 관현악단은 1990년 러시아 옛 도시인 뜨베리에서 뱌체슬라브 뜨루쉰에 의해 창단됐다. 그는 러시아 공훈 예술가이며, 전 러시아연방과 국제 콩쿨 수상자이다. 또한 그네신 국립 음악 대학의 교수로 제직중이며, 전 러시아연방 국립 관현악단에서 뛰어난 음악가 루돌프 바르쌰이, 이고르 베즈로드늬, 빅또르 뜨레찌야꼬프가 책임자로 있을시에 솔리스트겸 연주자로 약25년동안 활동했다.
1990년 12월 성삼위일체 교회에서 '러시아 모임'의 첫 연주가 있었다. 지난 5년 관현악단은 러시아 여러 도시에서 청중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러시아 모임'은 모스크바에서 꾸준한 연주 활동을 했다. 1992-93년 시즌에 모스크바 국립 필하모니에서 이미 5번의 공연이 매진되었다. 관현악단의 창단지인 뜨베리에서의 공연은 변함없는 성공을 이루고 있으며 매해 자선음악회를 개최한다. 1993년부터 관현악단은 유명한 국제무대에 초청되고 있다. 성황리에 이태리, 스페인, 독일, 이집트, 이스라엘, 터키에서의 공연을 마쳤다. '러시아 모임'의 주요 레파토리는 유럽 클래식의 다양한 실내관현악곡이며 또한 러시아 음악과 현대작곡가의 작품이다.
출처: http://www.mmv.cityline.ru/person/r-camerata.htm
유리 바쉬메트 (비올라)
모스크바 깐세르바또리야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페도르 드루쥐닌에게 사사받았다.
부다페스트(1975), 뮌헨(1976)에서 열린 국제 콩쿨 수상자이다.
유리 바쉬메트는 단지 솔리스트로만 유명한것이 아니라 실내관현악단 ≪솔리스트 모스크바≫를 창단한 책임자로 널리 알려졌다.
모스크바 깐세르바또리야 교수로 제직중이다.
출처: http://www.mmv.cityline.ru/person/bashmet.htm
크쎄니야 바쉬메트 (피아노)
5살부터 그네신 음악 영재학교, E.예프루시 선생님 클라스에서 정식 음악교육을 시작했다. 현재는 T.젤리크만 교수에게 사사받으며 교수제자 음악회에서 항상 연주를 한다.
10살때에 외국에서는 처음으로 뉴욕 어린이 페스트발(1990)에서 연주를 했고, 1992년 국제 페스트발 ≪러시아에서의 음악적 만남≫에서 모스크바 깐세르바또리야 말릐잘에서 실내관현악단과 협연을 했다.
1994년에는 쌍트뻬쩨르부르그에서 열린 ≪2000년의 명연주가≫ 페스티발에서 디플롬을 받았다.
앙상블 ≪솔리스트 모스크바≫와 러시아, 프랑스, 독일등지에서 여러번 연주 활동을 했다.
덧붙임: 이미 예측하셨겠지만 크쎄니아 바쉬메트는 이전글에 소개한 유리 바쉬메트의 딸입니다. 아버지는 비올리스트로 딸은 피아니스트로 대를 이어 우리들에게 좋은 음악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출처: http://www.mmv.cityline.ru/person/kbashmet.htm
게나지 라즈줴스트벤스끼 (지휘자)
20세부터 발쇼이 극장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으며, 30세에는 중앙 텔레비젼, 라디오방송 발쇼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예술 총감독과 상임지휘자를 맡았다. 35세에 발쇼이 극장으로 돌아와서 오페라와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현재 구 소련연방 문화부 교향악단, 스톡홀롬 필하모니 교향악단, BBC 오케스트라(런던), ≪비인 심포니연주자≫ 오케스트라, 또한 모스크바 실내악극장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다.
게나지 라즈줴스트벤스끼는 해외 음악 아카데미 명예회원이다.
덧붙임: 소식을 들으신 분들에게는 이미 익숙하듯이 게나지 라즈줴스트벤스끼는 이번에 발쇼이 극장 예술 총감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특히 내년이 발쇼이 극장 개관 225주년이 되며 9월부터 225회째 시즌이 시작됐습니다. 훌륭하고 멋진 공연이 많이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출처: http://www.mmv.cityline.ru/person/grozhd.htm
이고르 모이세에브 (무용)
1906년 1월 21일 키에프에서 출생. 아버지-모이세에브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법률가, 변호사, 어머니-그렌 안나 알렉산드로브나. 부인-보이세에바 이리나 알렉세에브나. 딸-모이세에바 올가 이그레브나.
모스크바 B.I.마솔로보이(1920년)의 개인 발레 스튜디오에서 무용을 배우기 시작했다. 후에 발쇼이 극장 소속 안무학교에서 A.A. 고르스끼에게 사사받았다(1921-1924년). 1933년 예술 대학교를 마쳤다. 안무학교 졸업후 발쇼이 극장 발레단에 입단했다(1924-1931년). 후에 솔리스트로 활동을 했다(1931-1937년). 그는 발쇼이 극장 솔리스트들을 이끌어 가는 위치에 설수 있었으나 본인이 직접 안무가로 변신을 했다.
이고르 모이세에브는 전통예술에 관심을 갖기시작하면서 벨라루시아, 우크라이나, 까프까즈등지를 둘러보면서 민속춤에 관한 자료를 모았다.
1936년에는 전통예술분야의 탁월한 안무가로 인정을 받으며 제1회 소연방 전통춤 페스티발을 개최했다.
그는 화려하고 독창적인 전통춤이라는 무대안무의 새로운 쟝르를 열었다. 모이세에브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외국의 현대무용계 전통춤 무대안무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모이세에브는 M.로스뜨로뽀비치와 B.클라이베른에 이어 러시아와 미국의 문화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제폰드에서 상금을 수여받았다(1995년 11월).
덧붙임: 개인적으로 얼마 전 그의 공연을 보고 한마디로 반했습니다. 러시아에 있으면 한번쯤은 꼭봐야 한다고 추천할만합니다. 94세인 지금까지도 직접 안무동작을 보여주곤한답니다.
출처: http://www.biograph.comstar.ru/bank/moiseev.htm
A.루빈쉬테인(1829-1894)의 로망스 'Ночь'를 접하면서 그가 작곡한 곡들의 아름다운 멜로디에 반해버렸다. 오페라 '데몬'(악령) 역시 나에게 그러한 만족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신을 대적해서 전쟁과 고통이 가득찬 세상을 소유하고자 하는 야욕에 가득찬 데몬의 유혹, 잔인함, 고뇌등은 음악속에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면서 그의 심정을 대변한다.
결혼식을 기다리던 따마라에게 신랑의 죽음이 전해지고, 슬픔에 빠진 따마라는 수녀원으로 갈것을 허락해달라고 아버지-구달백작에게 요구하는 장면은 사랑하는 딸에게 이런 비극이 일어난것과 딸을 떠나 보내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이 애절하게 묘사되어있다.
어느새 데몬은 따마라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고 인간적인 행복을 갈구하게 된다. 그러한 데몬의 마음은 천사의 방해를 받으면서 들끓는 미움으로 돌변하고 따마라를 소유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한다. 여기서 음악은 그가 데몬이라고 생각하기엔 인간적인 면마저 느껴지게 한다.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며 따마라를 유혹하는 데몬. 따마라는 거듭 그를 거부하지만 그의 말에 점점 사랑으로 이끌리는 것을 어쩔 수 없다. 데몬은 따마라에게 고통의 입맞춤을 하고 따마라는 죽음을 맞이한다. 따마라의 죽음으로 '깨끗한 영혼'을 소유하게 되어 자신의 욕망을 이룰 것을 기대했던 데몬은 천사의 등장으로 패배를 인정하게 되고 다시금 혼자가 된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합창 또한 분위기를 더했지만 마지막에 선의 승리를 기뻐하는 천사들의 합창은 웅장함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2막으로 이루어진 이 오페라에는 아름다운 아리아가 많이 등장한다. 특히 데몬의 아리아는 바리톤이라면 누구나 욕심을 낼만한 곡이다. 고뇌하는 모습을 결코 격렬하지 아니하게, 어찌보면 차분하고 서정적으로 표현한 A.루빈쉬테인의 특징이 드러나는 오페라이다.
글린카
위대한 러시아 작곡가, 러시아 클래식 음악의 창시자. 그의 작품은 풍부한 전통음악과의 조화를 이룬 러시아와 세계문화의 정점이다. 밝고 낙천적인 성격, 엄격한 형식, 아름답고 표현력 풍부한 성악적 멜로디, 다양한 형태, 그림같이 섬세한 화성 그리고 기악편성법은 글린카 음악의 품격을 한층 높인다.
글린카는 1804년 5월 30일 스몰렌스크현에서 태어났다. 유모는 뿌쉬낀과 마찬가지로 많은 이야기와 노래를 알고 있는 재능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친척에게는 음악 농노들로 구성된 극장과 오케스트라가 있었고, 그는 음악 농노들에게 음악을 배웠다. 그는 특별히 러시아음악을 사랑했다. 그는 “아마도 이 노래들에서 나의 어린시절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나중에 러시아민속음악을 연구하게 된 주원인이다”이라고 했다.
1818년 글린카는 학업을 위해 뻬쩨르부르그로 가서 교육전문학교산하의 귀족기숙학교에서 공부했다. 뿌쉬낀의 선생이기도 했던 꾸니찐, 가리치(철학) 교수들에게 수업을 받았다.
글린카는 가지않았던 곳이 없었으며, 항상 음악과 함게 바쁘게 지냈다. 1825년이 되면서 글린카는 전문적인 작품의 길을 시작한다. 그는 라바띈스끼, 주꼽스끼, 뿌쉬낀의 시에 훌륭한 가곡을 작곡했다. 그의 가곡은 단순하고 진실하다.
한편 뻬쩨르부르그에서의 활동적이고 흥미있는 삶에도 불구하고, 글린카는 서유럽의 음악세계에 관심을 갖고 접근했다. 1830년 이태리로 가서 밀라노, 나폴리, 베네치아의 오페라 극장을 접했고, 루비나, 빠스타, 땀부리나의 훌륭한 성악예술에 매혹되었다.
베를린에 있으면서 글린카는 유명항 음악가 덴과 만났었다. 덴은 글린카를 위해 ‘음악이론의 기본’을 썼다. 글린카는 이책을 매우 소중히 여겼으며, 나중에 다르가믜스끼에게 이책을 선물했다.
1834년 봄 글린카는 뻬쩨르부르그로 돌아와 예술을 사랑하는 분위기의 친구들과 교류를 갖으면서 오페라작품 “이반 수사닌”에 착수했다. 또 하나의 오페라 “루슬란과 류드밀라”는 전설속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심오한 사상을 내포한다. 오페라를 통해 작곡가의 재능은 절정에 이른다.
스페인에서 머물던 글린카는 집과 같은 편안함을 느끼며 단순한 스페인 민속 멜로디가 아니라 스페인의 심장을 의미하는 ‘아라곤의 호타’를 작곡했다. 1847년에는 바르샤바에서 스페인을 회상하며 ‘마드리드의 밤’과, 러시아 춤곡 ‘까마린스까야’를 썼다.
특히 글린카는 다르가믜스끼와 친하게 지냈으며 ‘두남자’라는 민속생활 드라마 소재의 오페라를 구상하기도 했다. 1855년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힘들어 하던 그는 1856년 2월 30일 독일에서 숨을 거두었다.